정신과 의사의 슬기로운 사회공헌활동기

[대한신경정신의학회 특별기획 – 함께 가는 길을 묻다]

정신과 의사의 슬기로운 사회공헌활동기

진행: 김혜민 (방송인)

출연: 정찬승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사회공헌 특임이사 / 마음드림의원 원장)

1. 프롤로그: 위기의 시대, 환자와 동행하는 의사를 만나다

김혜민: 의료 현장의 위기가 심화되는 시대, 우리는 함께 길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환자와 따뜻하게 동행하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를 만나 의사가 지켜야 할 진정한 가치와 미래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와 신경정신의학정책연구소가 함께 만드는 특별 기획, [함께 가는 길을 묻다] 진행을 맡은 김혜민입니다. 어려운 시기이지만 환자와 동행하며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는 회원분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요. 오늘의 동행자를 소개합니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사회공헌 특임이사이자 마음드림의원을 운영하고 계신 정찬승 선생님이십니다. 선생님, 어서 오세요!

정찬승: 네, 안녕하세요. 정찬승입니다. 반갑고 영광입니다.

김혜민: 평소에 유튜브를 즐겨 보시는 편인가요? 처음 섭외 의뢰를 받으셨을 때 어떠셨는지 궁금해요.

정찬승: 그럼요, 즐겨봅니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는 ‘왜 나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그동안 이 자리에 출연하셨던 선배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부담이 참 컸거든요. 특히 진료 현장에서 피땀 흘려 봉사하고 노력하시는 천영훈 원장님 같은 분들을 제가 무척 존경합니다. 감히 그분들이 걸어오신 고생을 따라갈 수도 없는데, 그 뒤를 이어 나온다는 게 큰 부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더없는 영광입니다.

김혜민: ‘왜 나지?’ 하셨던 그 이유에 대해서는 오늘 저와 깊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실 겁니다. (웃음) 본격적인 대화에 앞서 학회 회원분들께 인사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정찬승: 안녕하십니까,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사회공헌 특임이사를 맡고 있는 정찬승입니다. 회원 여러분, 이렇게 영상으로나마 만나 뵙게 되어 대단히 반갑습니다.

2. 패션과 융학파, 그리고 무의식이 보낸 꿈의 메시지

김혜민: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몇 가지 키워드를 뽑아봤습니다. ‘사회공헌’, ‘언론인’, ‘트라우마’, ‘융학파(분석심리학)’, 그리고 ‘패션과 마라톤’입니다. 사실 제가 선생님을 처음 뵀을 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신과 의사의 전형적인 모습과 조금 달라서 인상 깊었습니다. 아주 멋진 구조회사의 영업이사나 패션모델 같으시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수트를 굉장히 멋지게 잘 소화하시는데, 특별한 사연이 있으시다고요?

정찬승: (웃음)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수트를 정성껏 갖춰 입고 다니는 데는 사실 제 인생을 바꾼 아주 중요한 꿈과 무의식의 사연이 얽혀 있습니다.

저는 분석심리학, 즉 융학파 정신분석을 전공했습니다. 융학파에서는 정신분석을 할 때 꿈을 분석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사람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이루어진 전체적인 존재인데, 보통은 의식만 인지하고 살아가죠. 하지만 무의식은 의식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늘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보냅니다. 그 메시지가 주로 표현되는 통로가 바로 ‘꿈’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제가 외부 사회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평범한 개원의로만 조용히 지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대중적인 활동이나 방송 출연, 언론 인터뷰 같은 것을 엄청나게 꺼리고 조심하던 때였죠. 그런데 어느 날 한 방송사에서 출연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나가면 인지도도 높아지고 병원 홍보도 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나갈까 말까’ 밤낮으로 엄청나게 고민을 했었습니다. 마침 그 무렵에 아주 기묘한 꿈을 꾸었습니다.

김혜민: 어떤 꿈이었나요?

정찬승: 꿈속에서 제가 아주 근사하고 규모가 큰 양복점에 갔습니다. 점원에게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낡았으니 세탁(드라이클리닝)을 해달라”고 맡겼죠. 다음 날 학회 회의를 마치고 옷을 찾으러 양복점에 다시 갔는데, 정말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양복점 점원이 제 소중한 양복을 대걸레 마대 자루에 끼워서 바닥을 벅벅 닦고 있는 겁니다!

너무 놀라 “이게 무슨 짓이냐!”고 소리를 질렀는데도 점원은 들은 체 만 체하더군요. 한쪽에서는 양복점 사람들이 모여 ‘어떻게 하면 좋은 옷을 팔지’ 회의를 하고 있었고요. 너무 큰 충격을 받고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김혜민: 세상에, 소중한 양복이 걸레 취급을 당하다니요. 꿈에서 깨어나서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정찬승: 분석심리학에서는 이를 ‘무의식의 보상 기능’이라고 부릅니다. 자아(Ego)의 방향이 한쪽으로 너무 치우칠 때, 무의식은 균형을 맞추기 위해 반대되는 상징을 보여줍니다. 당시 저는 겉으로 보여지는 근사한 외양, 즉 의사로서의 사회적 가면인 ‘페르소나(Persona)’에 저도 모르게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었던 겁니다. 남들에게 멀끔하고 근사하게 보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컸던 거죠. 꿈은 제 페르소나를 완전히 걸레처럼 취급함으로써 그 집착을 사정없이 꺾어버린 것입니다.

꿈의 메시지를 깨닫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그래서 방송 출연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저보다 훨씬 훌륭한 분들이 많으니 그분들을 섭외하시라”고 양보하고, 다시 조용히 진료실에 집중했습니다.

김혜민: 그렇다면 페르소나에 집착하지 않기로 결론을 내리셨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자리에 맞게 멋진 옷을 갖춰 입으시는 건가요?

정찬승: 꿈이란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10여 년 전에는 그 꿈이 ‘페르소나를 버려라’라는 메시지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학회 일을 맡고, 기자, 문화예술인 등 다양한 공적 영역의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할 일들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공적인 자리에 나갈 때 정말 걸레 같은 옷을 입고 나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웃음)

그러다 우연히 제게 잘 맞는 수트를 추천해 주는 현실의 좋은 양복점 사장님을 알게 되었고, 옷을 한두 벌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문득 10년 전 그 꿈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그 꿈에 내가 놓친 숨은 의미가 있었을까?’ 하고 말이죠. 다시 복기해 보니, 꿈속의 양복점은 수많은 가능성과 근사한 옷들이 진열된 거대한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저는 그 수많은 가능성을 보지 못하고, 그저 제가 가진 낡은 옷 한 벌만 깨끗하게 세탁해 달라고 고집을 부렸던 것입니다.

즉, 무의식은 제게 “네가 공적인 역할을 수행할 때, 상황에 따라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수 있는 다양한 페르소나들을 준비해 두어라. 그것을 잘 활용하는 것이 공공의 이익과 너 자신에게 모두 도움이 될 것이다”라는 장기적인 가능성을 미리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10년이 지나 사회생활을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꿈의 진정한 인도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김혜민: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예전에 배우 김혜자 선생님이 구호 활동을 갈 때 항상 정성껏 옷을 갖춰 입고 화장을 하셨다는 일화가 떠오릅니다. 오지라고 해서 대충 입는 것이 아니라, 현지의 아이들과 사람들을 만날 때 최선을 다해 예의를 갖추는 것이 진정한 존중(TPO)이라는 뜻이었죠. 선생님의 패션 역시 사회공헌 특임이사로서, 그리고 환자를 대하는 정신과 의사로서 상대방에게 최선의 예의를 다하기 위한 ‘아름다운 페르소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스럽게 융학파와 패션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가 연결되네요.

3. 지구력의 힘, 마라톤과 정신건강의 크루 ‘마인드런’

김혜민: 융학파 정신분석 수련 과정은 본인이 직접 분석가에게 수년에서 10여 년간 분석을 받아야 할 만큼 길고 끈기가 필요한 분야로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무언가를 꾸준히 밀고 나가는 ‘지구력’이 엄청나신 것 같아요. 그 지구력이 최근 빠지신 ‘마라톤’으로도 이어진 게 아닐까 싶은데, 마라톤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정찬승: 정확한 분석이십니다. (웃음) 사실 마라톤 전에 웨이트 트레이닝을 먼저 시작했습니다. 운동을 시작한 목적은 단 하나, ‘진료를 더 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외부 활동은 제한된 반면, 제 업무량은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당시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에서 ‘심리사회방역지침’을 총괄하고 있었거든요. 매일 밤샘 작업을 하며 수면은 부족해지고 체중은 늘어났습니다.

진료실에 앉아있는데 피곤함 때문에 환자의 이야기에 온전히 집중하기가 힘들어지더군요. 의사 노릇을 제대로 하려면 내 몸부터 먼저 가꾸고 관리해야겠다는 절박함으로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마침 코로나로 어려움을 겪던 헬스장 트레이너 선생님과 서로 의지하며 열심히 루틴을 만들다 보니 기초 체력이 붙었고, 자연스럽게 달리기로 관심이 옮겨갔습니다.

달리기에 관한 명저인 『본 투 런(Born to Run)』 등의 책을 읽으며 영감을 받았고, 직접 몸으로 부딪쳐보기로 했습니다. 10km 대회를 완주하고 나니 하프 마라톤에 도전할 용기가 생겼고, 마침내 2024년 봄, 세계적인 플래티넘 대회인 서울마라톤(구 동화마라톤) 풀코스(42.195km)에 신청했습니다.

김혜민: 첫 풀코스 도전이셨는데, 체계적인 준비 없이 나가셔서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정찬승: 정말 말도 안 되는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체계적인 훈련법도 모른 채 주말마다 무작정 20km, 30km 거리만 늘려서 뛰고 대회에 나갔으니까요. 35km 지점을 지나갈 때는 정말 ‘내가 정신과 의사지만 제정신이 아니구나’, ‘다시는 마라톤을 하나 봐라’라며 제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어두운 그림자와 욕망, 분노가 다 올라왔습니다. 거의 악과 깡으로 마지막 7km를 달렸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승선에서 기다리는 가족들을 보며 완주를 해낸 순간, 거짓말처럼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다음에는 체계적으로 제대로 연습해서 풀코스를 멋지게 다시 뛰어봐야겠다!’ (웃음) 마라톤의 매력에 완전히 매료된 순간이었습니다.

김혜민: 그렇게 개인적으로 즐기시던 달리기가 최근에는 정신과 의사 선생님들이 함께 모여 달리는 ‘마인드런(Mind Run)’이라는 모임으로 확장되었다고요?

정찬승: 네, 맞습니다. 2026년 4월 8일, 광화문 YMCA 마라톤 대회 날 뜻이 맞는 동료 의사들과 모여 ‘정신건강을 위해 달리는 사람들의 모임’인 [마인드런]을 정식 결성했습니다. 처음에는 저와 가까운 동료 정신과 의사들을 중심으로 시작했는데, 정신건강에 관심이 깊은 언론인 분들도 동참하시면서 한 달 남짓 만에 회원 수가 27명을 넘어섰습니다.

국립법무병원의 서영은 과장님처럼 일찍이 달리기의 정신의학적 효과를 체계적으로 연구해 온 전문가가 코치 역할을 맡아 안전하게 이끌어주고 있습니다. 한 달에 한두 번씩 모여서 소위 ‘러닝 크루’로 활동하는데, 정말 신기한 경험을 하곤 합니다.

김혜민: 혼자 달릴 때와 모여 달릴 때 어떤 점이 다른가요?

정찬승: 우리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격렬하게 뛰지 않습니다. 옆 사람과 편안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아주 느린 속도, 산책보다 조금 빠른 속도로 약 3~4km를 가볍게 달립니다. 그런데 달리기가 끝나고 나면 참여한 모든 선생님의 얼굴이 마법처럼 환하고 행복하게 바뀝니다.

생리학적으로는 뇌에서 엔도카나비노이드(Endocannabinoid) 같은 물질이 분비되어 행복감을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료들과 함께 발을 맞추는 공동체의 경험이 주는 치유 효과가 엄청납니다. 정신과 의사들이 진료실에서 환자들의 고통을 들으며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습니까. 일상적인 스트레스로 가득했던 의사들이 달리기를 통해 치유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칼 구스타프 융은 “치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치료자의 확신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의사가 몸소 경험하여 ‘이 운동이 마음 치료에 확실히 효과가 있다’는 확신을 가질 때, 비로소 진료실에서 환자들에게 “일주일에 몇 번, 몇 km씩 가볍게 뛰십시오”라고 진정성 있게 권할 수 있습니다. 마인드런을 시작한 이후 많은 선생님의 삶의 리듬이 바뀌고 술도 줄었습니다. 영육이 건강해진 임상 네트워크가 형성된 것이죠.

김혜민: 방송을 보고 계신 학회 회원분들이나 동료 전문가분들 중 ‘마인드런’에 동참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정찬승: 제 연락처는 이미 공공재나 다름없이 학회 등에 잘 공개되어 있습니다. (웃음)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시거나 학회 사무실을 통해 문의해 주시면 언제든 대환영입니다.

4. 세월호 참사, 그리고 재난정신건강위원회의 출범

김혜민: 개인의 무의식을 깊게 탐구하는 분석심리학자가, 수많은 사람이 얽혀 있는 거대한 시스템이자 조직인 학회 활동, 그것도 ‘사회공헌’의 최전선에 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개원의로서 학회 일을 활발히 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정찬승: “개원의라서 학회 활동에 소극적이다”라는 말은 사실 오해나 핑계에 가깝습니다. (웃음) 정신분석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나 칼 융 역시 대학 상아탑에만 머물렀던 사람들이 아니라, 개인 클리닉을 운영하며 현장에서 환자들을 치열하게 만났던 개원의들이었습니다. 그들의 학문적 진정성에 공감한 이들이 모여 학파가 형성된 것이죠. 따라서 개원의라고 해서 학술 활동이나 사회적 기여에 제약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편견입니다.

물론 저는 본래 개인의 내면을 일대일로 깊이 파고드는 탐구를 좋아하고, 집단주의적인 운동이나 시스템 체계에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다만 제 성격상 존경하는 스승님들이나 선배, 동료들이 인간적인 정으로 부탁하는 일을 거절하지 못하는 면이 있습니다. (웃음) 밤새워 박스 깔고 자며 몸으로 때우는 궂은 학회 일들을 도맡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깊이 관여하게 되었는데요. 제 삶과 의사로서의 궤적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결정적인 사건은 2014년 세월호 침몰 사고였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터졌을 때 온 나라가 형언할 수 없는 비탄과 충격, 트라우마에 빠졌습니다. 당시 상계백병원의 이동우 교수님께서 제게 전화를 걸어오셨습니다. “정 원장, 지금 학회가 사회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이대로 사람들을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당장 대책을 정리해 봐라” 하셨죠.

제가 학회 대표자도 아니었지만, 긴박한 심정으로 밤을 새워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의 사례들을 이 잡듯 뒤졌습니다.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국민의 정신건강을 체계적으로 담당하는 파트가 해외에는 명확히 존재하는데, 우리나라에는 공백 상태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에 대한신경정신의학회와 대한정신건강재단 산하에 공식 구심점이 될 ‘재난정신건강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는 아웃라인을 정리해 제안했고, 다행히 TF를 통과해 정식 부서가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김혜민: “이대로 사람들을 두어서는 안 된다”라는 전문가들의 절박한 외침이 우리 사회를 한 단계 진보시켰군요.

정찬승: 그렇습니다. 결코 저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당시 무려 300명이 넘는 정신과 선생님들이 자신의 병원 문을 닫거나 진료를 비워두고 안산 단원고 현장으로, 진도 팽목항 현장으로 달려가셨습니다. 사방에서 의사들이 진료실 밖으로 나가 ‘아웃리치(Aoutreach, 찾아가는 지원 활동)’에 눈을 뜨고 적극적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돕기 시작한 역사적 시점이었습니다.

초대 위원장이신 채정호 교수님을 시작으로 백종우 교수님, 그리고 현재 석정호 교수님까지 위원회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세월호 참사가 정리되면 해체될 한시적 조직일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포항 지진, 코로나19 팬데믹, 그리고 최근의 이태원 참사에 이르기까지 상상치 못한 재난급 충격들이 연이어 발생했습니다.

그때마다 재난정신건강위원회가 구심점이 되어 수많은 의사를 현장과 연결하고, 국가적인 심리방역 시스템을 구축하는 통로 역할을 해낼 수 있었습니다.

5. 보이지 않는 곳의 고통을 찾아서: 언론인과 문화예술인의 치유

김혜민: 재난 현장에서 다져진 아웃리치의 정신이 2018년 권준수 이사장님 시절 출범한 ‘사회공헌위원회’로 이어졌고, 선생님께서 이소영, 이해우 이사님의 뒤를 이어 3대 사회공헌 특임이사 겸 위원장을 맡으셨습니다. 코로나19로 대면 상담이 어려워진 위기 속에서 활동의 패러다임을 바꾸셨다고 들었습니다.

정찬승: 네, 코로나 이전까지는 미혼모 시설이나 소외계층 보호시설을 직접 찾아가 로테이션 상담을 하는 직접 지원 위주였습니다. 하지만 감염병으로 대면 활동이 전면 차단되면서 모든 활동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죠. 손놓고 있을 수만은 없어 발상을 전환했습니다. ‘우리 사회에 분명히 존재하고 깊은 정신적 위기를 겪고 있지만, 사회적 편견이나 등잔 밑이 어두워 제대로 인식되지 못했던 직군들을 찾아내 관심을 환기하고 연대하자’는 방향이었습니다. 그 첫 번째 대상이 바로 ‘언론인(기자)’이었습니다.

김혜민: 기자들의 정신건강이라니, 대중에게는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정찬승: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수습 기자 및 경력직 기자 교육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와서 깊이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기자들은 세월호 참사 이후 취재 방식에 대한 비판과 함께 ‘기레기’라는 멸칭으로 불릴 만큼 극심한 사회적 비난과 불신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신과 의사인 제 역할은 누가 도덕적으로 옳고 그른지 따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사람이 겪고 있는 고통의 실체를 보고 돕는 것입니다. 언론인들과 깊이 소통하며 그들의 낡은 취재 환경과 심리적 속앓이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기자들은 대형 산불, 참사, 범죄 현장 등 참혹한 재난 현장의 최전선에 안전 가이드라인이나 심리적 보호 장비도 없이 맨몸으로 투입됩니다. 끔찍한 현장을 목격하고 돌아와도 사회적 비난 분위기 때문에 “기자가 뭐가 힘드냐”, “당신들이 잘못 보도해 놓고 왜 아프다고 하느냐”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힘들다는 내색조차 하지 못합니다. 직업적 긍지는 바닥에 떨어져 있고 정신적 트라우마는 임계점에 달해 있었죠.

김혜민: 그래서 언론인 트라우마 지원 전문 기관인 전 세계적인 ‘다트 센터(Dart Center)’가 있는 호주 멜버른으로 방송기자분들과 함께 열흘간 합숙 교육을 다녀오셨다고요. 개원의로서 열흘간 병원을 비우는 것이 엄청난 결단이었을 텐데요.

정찬승: SBS 이정희 기자님의 초대로 학회 심포지엄을 열었을 때, 옆에 계시던 백종우 교수님이 저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정 원장이 다녀오지?” 하셨습니다. 또 거절을 못 했죠. (웃음)

많은 개원의 선생님들이 이런 공익적 활동에 나서기 주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단순한 매출 손실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열흘 동안, 내가 책임지고 있는 수많은 환자가 주치의 없이 방치되면 어쩌나’ 하는 심리적 부담감과 책임감이 1순위입니다. 다행히 저는 분석심리학 위주의 클리닉이라 환자(피분석자)분들과 미리 심도 있게 상의하여 양해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경제적인 이득만 쫓다 보면 어느새 돈의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길게 보고 내 인생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중심을 잡고자 노력했습니다.

멜버른에서 기자 12명과 열흘간 먹고 자며 합숙한 경험은 경이로웠습니다. 참혹한 취재 현장에서 동료를 잃거나 트라우마를 겪은 기자들이 치열하게 배우고 서로의 아픔을 털어놓으며 집단적인 ‘치유와 회복’이 일어났습니다. 멜버른 다트 센터 스태프들도 한국 팀의 열정에 감탄했죠. 그때 깨달은 핵심은 바로 ‘피어 서포트(Peer Support, 동료 지원)’였습니다. 전문가의 개입보다 동료가 동료를 챙기고 지지하는 자생적 시스템이 가장 강력하다는 사실을 배운 것입니다.

그 결과 한국으로 돌아와 언론인 피어 서포트 그룹을 결성했습니다. 이 자생적 네트워크의 힘은 작년과 올해 발생한 비상계엄 사태, 제주항공 여객기 추락 사고, 서부지법 폭동 취재 기자 폭행 사건 등 굵직한 위기 때마다 빛을 발했습니다. 재난 현장에서 충격에 빠진 유족들을 취재하며 죄책감과 불면증에 시달리는 기자들을 위해 실질적인 심리 가이드라인을 제공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연대의 힘 덕분이었습니다.

김혜민: 유족 취재는 기자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영역이지요. 정신과 의사로서 기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조언이 있으시다면요?

정찬승: 기자들에게 늘 강조합니다. 유족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내 소중한 가족의 이야기가 세상에서 잊혀지는 것’입니다. 진정성을 가지고 오랫동안 곁에 머물며 라포(신뢰 관계)를 쌓은 기자는, 의사나 상담가에게도 하지 못했던 유족의 깊은 응어리를 세상에 들려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것이 언론의 숭고한 의무이자 유족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치유 기회입니다. 기자가 건강하게 보호받아야 국민을 보호하는 건강한 기사가 태어날 수 있습니다.

김혜민: 참 감동적입니다. 언론인뿐만 아니라 대중의 왜곡된 투사와 환상 속에서 고통받는 연예인, 문화예술인들을 위한 ‘생명지킴이단(Gem)’ 활동 및 학회 심포지엄을 통한 당사자 목소리 청취, 그리고 경계성 인격장애를 다룬 창작 뮤지컬 『다이어리』 같은 문화 예술 작품의 자문 및 전석 매진 지원에 이르기까지… 정말 사회의 다양한 그늘진 곳에 의사로서의 선한 영향력을 넓혀오셨네요.

6. 에필로그: 전문성과 사회적 책무가 만나는 지점에서 길을 찾다

김혜민: 선생님의 열정적인 발자취를 듣다 보니 시간이 정말 화살처럼 흘러갔습니다. 이제 대담을 마무리할 시간인데요. 우리가 이 방송을 기획한 본질적인 이유는 진료실 안에서 환자를 돌보는 본연의 임무를 넘어, “사회가 우리를 부른다”라는 메시지를 현장의 후배들과 전공의들에게 선배들의 삶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진료실의 문을 열고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길 주저하는 후배 의사들에게 따뜻한 격려와 조언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정찬승: 사랑하는 후배 여러분, 여러분 자신에게 이 질문을 꼭 한 번 던져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전문성과 사회적인 책무가 만나는 지점은 어디인가?”

그 만남의 지점에서 비로소 정신과 의사로서 펼칠 수 있는 진정한 사회적 공헌과 책무의 이행이 시작됩니다.

오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제가 엄청나게 사회에 관심이 많고 대단한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사람처럼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본래 세상 돌아가는 뉴스도 잘 안 보고, 새로운 사람 만나는 것도 어색해하며, 연예인 환자가 오면 부담스러워하는 지극히 내향적이고 평범한 의사입니다.

지금까지의 제 발자취는 제가 잘나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려 한 것이 아니라, 학회나 시대의 부름을 통해 제게 주어진 소명(Calling, 콜링)에 그저 도망치지 않고 성실하게 응답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빚어진 결과물일 뿐입니다.

앞으로 우리 사회는 정신건강에 대한 수요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과거의 방식대로 진료실 안의 안전한 간림벽만 고수한다면, 거대하게 변화하는 사회적 수요와 시대의 아픔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습니다. 의사 자신과 치료 영역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사회적 역할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진료실 밖의 활동만 중요하고 진료실 안의 진료는 가치가 적은 것일까요? 절대 아닙니다. 진료실 안에서 단 한 명의 환자와 마주 앉아 영혼을 다해 치유하는 그것이야말로 의사로서 가장 신성하고 핵심적인 본질입니다.

제가 사회공헌 활동을 하며 개인적으로 가장 큰 혜택과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제 진료 역량의 비약적인 강화’였습니다. 진료실 밖으로 나가 다양한 직군, 다양한 계층, 그리고 재난의 한복판에 선 사람들의 처절한 삶을 목격하고 관여하면서, 인간에 대한 제 이해와 공감의 깊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넓어졌습니다.

그렇게 사회 현장에서 눈물로 넓혀진 이해와 공감의 지평은 결코 허공으로 흩어지지 않습니다. 고스란히 제가 매일 출근하는 진료실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게 됩니다. 내 앞에 마주 앉은 상처 입은 단 한 사람의 영혼을 그 누구보다 깊이 있게 공감하고 품어줄 수 있는 가장 단단하고 비옥한 밑거름이 되어 돌아오는 것입니다.

심오한 이론을 공부하는 것도 뼈대를 세우는 데 중요하지만, 사회적으로 열린 마음을 품고 참여하는 것은 결국 돌고 돌아 자기 자신의 마음을 건강하게 하고 진료실의 환자를 살리는 최고의 길입니다. 후배 여러분들이 이 기쁨을 꼭 함께 누리셨으면 좋겠습니다.

김혜민: ‘나의 전문성과 사회적 책무가 만나는 지점’, ‘소명(콜링)에 성실히 응답하는 삶’, ‘결국 그 이득은 나 자신과 내 진료실의 환자에게 돌아온다’는 이 세 가지 주옥같은 메시지가 많은 회원과 후배들의 가슴에 깊은 울림을 주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진료실의 문을 열고 세상을 치유하는 정찬승 선생님, 앞으로도 더 많은 부름에 응답하시며 멋진 행보 이어가시길 응원합니다. 오늘 귀한 시간 내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정찬승: 네,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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