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4.2 조선일보 칼럼. 가해자의 자살, 생존자의 고통

“가해자의 자살, 생존자의 고통”

성폭행 가해자로 지목된 인물이 자살하는 일이 발생할 때가 있다. 가해자도 인간인지라 고통이 심한 경우 법적 절차가 시작되기 전이나 도중에 자살을 떠올리는 것이다.

영향력이 큰 인물인 경우 커다란 사회적 파장이 생기고 가족과 주변인의 안타까운 사연이 소개되며 애도 분위기가 조성된다. 이 와중에 가장 조용히, 그러나 가장 깊은 혼란과 고통에 빠지는 사람은 바로 성폭력을 고발했던 피해자다.

가해자의 자살은 종종 ‘사건의 끝’처럼 여겨진다. 법정에서 책임을 물을 기회는 사라지고, 사건의 전말에 대한 규명보다는 죽음이 주는 충격 때문에 안타까움과 침묵으로 분위기가 전환된다.

우려되는 것은 사람들의 반응이다. 권력과 지위를 가진 가해자의 자살은 비극으로 포장되고 피해자의 고통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피해자를 원망하고 비난하는 여론은 피해자에게 또 다른 침묵을 강요하며,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는 권리마저 빼앗는다. “가해자가 죽었는데 뭘 더 바라나” “죽은 사람을 더 이상 비난하지 말자”라는 압박 속에서, 피해자는 상처를 회복할 기회마저 잃는다.

성폭행 피해자는 트라우마 반응, 우울, 불안, 해리, 자살 충동 등 복합적인 정신 건강 문제를 겪는다. 미국의 성폭력예방네트워크(RAINN)에 따르면, 성폭행을 당한 여성의 94%가 2주 이내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증상을 겪고, 30%가 9개월이 지난 후에도 고통을 호소하며, 33%가 자살을 고려하고, 13%가 자살을 시도한다.

성폭행 가해자의 자살은 피해자를 위로하기는커녕 트라우마를 더욱 깊게 만든다. 가해자가 더 이상 자기를 괴롭힐 수 없게 됐다는 안도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고, 피해자의 트라우마 위에 ‘죄책감’과 ‘혼란’이라는 새로운 고통을 더한다. 특히 가해자가 친인척, 동료, 지인인 경우 피해자는 “내가 말하지 않았다면 저 사람은 살았을 텐데”라는 자책 속에 트라우마가 악화한다.

이런 때일수록 피해자의 정신 건강을 최우선에 둬야 한다. 피해자가 겪는 감정은 단순한 슬픔이나 분노가 아니다. 정의가 사라질 때, 고통이 외면당할 때, 낙인과 혐오가 쏟아질 때 피해자는 견딜 수 없는 혼란과 고통에 빠져든다.

가해자의 자살은 피해자에게 있어서 이차적 피해나 다름없다. 피해자가 경험한 복합적인 감정, 충격, 공포, 분노, 우울, 죄책감, 억울함, 안도감까지…. 모두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상담과 치료가 필요하다.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숙연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 죽음이 정작 존중받아야 할 사람의 삶을 다시 짓밟는 방식으로 인식돼서는 안 된다.

트라우마를 당한 사람을 피해자라고 부르지 않고 생존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여전히 살아있고, 자신의 고통을 말할 권리가 있으며, 고통을 견뎌낸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트라우마 생존자는 단지 피해자가 아니라, 살아남고, 살아가는, 존엄한 사람이다.

(정찬승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사회공헌특임이사, 조선일보, 2025년 4월 2일)

https://www.chosun.com/opinion/contribution/2025/04/02/KVID2SCPS5DUBBRUPMZU34B2IY/?fbclid=IwY2xjawQnCSVleHRuA2FlbQIxMQBzcnRjBmFwcF9pZBAyMjIwMzkxNzg4MjAwODkyAAEeWg_0bAM5bRyhdfv_YXv1eoTuXhm4MwUFMacE_p7pCAOnfTqdP4-eF64zABU_aem_FioNk8bUBb-1hWNZsxoQ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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