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와 우울증 구별하기

  • 이 글은 대한신경정신의학회와 네이버가 함께 기획한 정신건강 특집 섹션에 실린 글입니다.
  • 작성자: 정찬승 (마음드림의원 원장, 대한신경정신의학회 홍보위원)

박말례(가명) 할머니는 석 달 전부터 어딘가 이상해졌다. 표정이 멍해지고, 조금 전에 들었던 말도 잘 기억하지 못하며, 옷을 입을 때도 단추를 엇갈려 채우는 일이 많았다. 게다가 일 주일 전에는 갑자기 “집 재산이 다 거덜났다. 나는 거지가 돼 버렸다”며 엉뚱한 말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할머니 댁은 그렇게 궁핍하지도 않았고 먹고 살만했는데도 말이다. 할머니의 가족들은 할머니가 치매에 걸린 것이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겉으로 드러나는 박말례 할머니의 증상은 누가 봐도 치매 증상이다. 기억력이 떨어지고,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옷 입기조차 어려워지고, 현실과 전혀 다른 망상까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의 상담 결과, 숨어있던 반전이 발견되었다.
석 달 전까지만 해도 할머니는 맞벌이하는 딸과 사위 때문에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할 정도로 건강했다. 활달한 성격에 이웃과도 잘 지내는 편이었다. 특히 어릴 때부터 애지중지 키워 온 손주는 대학에 가서도 할머니를 끔찍하게 챙기고 잘 따랐다. 그런데 그런 손주가 석 달 전, 갑자기 군대에 들어갔다. 할머니는 손주가 군입대한 후로 한숨을 쉬고 눈물을 흘리는 날이 많아지더니, 어느 날인가부터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 하게 허공을 응시하며 앉아만 있을 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날이 많았다. 뭔가 해 볼 의욕도 잃어버렸다.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입맛도 없어서 석 달 사이에 체중이 5kg이나 줄어들었다. 말귀도 잘 알아듣지 못하고, 남들의 얘기에 관심조차 없는 것처럼 보였다.
치매에 걸린 것처럼 보였던 할머니는 사실 우울증에 걸린 것이었다. 물론 그 이유는 사랑하는 손주를 멀리 떠나보낸 데 따른 상실감 때문이었다.

치매와 닮은 노인의 우울증 증상

박말례 할머니의 경우처럼 노인의 우울증은 치매와 구별하기 어렵다. 치매에 걸리면, 인지기능(기억력, 언어기능, 판단능력, 시공간지각력 등)의 저하와 함께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기능들(식사하기, 대소변 가리기, 목욕하기, 전화 걸기, 물건 사기 등)을 잘 수행할 수가 없으며, 정신행동증상(우울증, 망상, 불안, 초조, 배회 등)이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노인이 우울증에 걸릴 경우 기분만 우울해지는 것이 아니라, 기억력이나 판단력 등 인지기능이 저하되어 치매로 잘못 진단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상태를 가성치매라고 한다. 가성치매와 진짜 노인성 치매와의 차이점은 인지기능의 회복이다. 가성치매의 경우 우울증에서 회복되면 인지기능도 회복된다.

때문에 노인이 치매 증상을 보인다면 반드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진찰을 받아야 한다. 잘못된 치매 진단은 환자와 가족에게 큰 부담이 될 수 있으며, 엉뚱한 치료를 받게 만들기 때문이다. 다행히 가족과 함께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던 박말례 할머니는 정확한 진단을 받은 후 적절한 치료를 받아서 우울증에서 회복되었고, 기억력도 온전히 회복되어 예전처럼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Tip. 치매와 구별할 수 있는 노인 우울증의 특징

  • 우울한 기분이 매우 두드러진다.
  • 일반 치매에 비해 인지기능 손상이 갑자기 나타난다.
  • 치매 환자들은 기억력이 떨어진 것을 감추려고 애쓰는데, 우울증 환자들은 기억력이 떨어진 것을 강조하며 도와달라고 말한다.
  • 최근 사건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치매 환자들은 기억이 나지 않더라도 비슷하게 맞추려고 하는데, 우울증 환자들은 그냥 ‘모르겠다’고 쉽게 말해버린다.
  • 우울증상이 좋아졌다가 나빠졌다가 할 때 인지기능도 좋아졌다가 나빠졌다가 한다. 그러나 치매는 인지기능의 저하가 비교적 일정하게 유지된다.
  • 우울증에서 회복된 후에는 인지기능도 회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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