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칠순이 된 김예분(가명) 할머니는 몸 여기저기가 아프다. 몇 년 전부터 소화가 안돼 속이 더부룩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손발이 차갑고 저리며, 몸 여기 저기가 쑤시고 아픈 증상 때문에 힘들어 했다. 할머니는 내과, 가정의학과, 정형외과 등 많은 병원을 찾았지만, 여러 병원을 다녀봐도 이렇다 할 병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런 저런 약을 먹어봐도 증상은 좋아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김 할머니는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다. 전문의와 면담을 하면서도 할머니는 온통 ‘온몸이 아프다’는 이야기만 했다. 면담을 진행하는 동안 조금씩 마음이 열리면서 할머니는 아픈 몸 외에 이야기를 하나 둘씩 하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할머니의 인생은 파란만장한 드라마 스토리였다. 젊은 시절에는 남편이 외도로 속을 썩이더니, 늘그막에는 자녀들 사업이 잘 안 풀리고, 며느리며 사위도 영 시원치 않았다. 몇 년 전부터 집안에 홀로 앉아 있으면 한숨이 절로 나오고, 기분이 푹 가라앉고, 입맛도 없었다. 밤에도 잠을 못 이루고, 만사가 귀찮아졌다. ‘차라리 죽는 게 낫지’라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곤 했다.
몸의 통증으로 표현되는 노인들의 우울
우울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은 우울증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우울하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사실 자신이 우울한지조차 모르는 우울증 환자들도 많다. 특히 노인들은 자신의 기분을 말로 표현하는데 서툴다. 하지만 숨길래야 숨길 수 없고, 무시할래야 무시할 수 없는 것이 기분이다. 말로 표현되지 않은 기분은 몸으로 표현된다.
몸이 하는 말은 어떻게 표현될까? 우리가 우울할 때면 흔히 하는 말들이 있다. “가슴이 답답해”, “가슴이 조여와”, “한숨만 나와”, “속이 타 들어가”, “속이 썩어”, “아이구, 골치야”, “어깨가 무거워”, “기운이 하나도 없어” 일상 생활에서 푸념처럼 자주 하는 말이다.
누군가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이런 말들을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심정이 답답하고 우울하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이 말들 중 어디에도 ‘우울’이나 ‘기분’, ‘감정’ 같은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노인들은 ‘나, 요즘 기분이 우울해’라는 세련되고 추상적인 표현보다는, 이렇게 몸으로 느껴지는 우울 증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 기분이 아니라 마치 몸이 우울한 것처럼 보일 정도다.
가슴이 아프다, 배가 아프다, 변비나 설사가 심하다, 병에 걸린 것만 같다, 여기저기가 쑤시고 아프다는 등의 증상이 특별한 원인 없이 지속되면 우울증을 생각해야 한다. 이런 것들이 바로 우울증의 대표적인 신체 증상들이기 때문이다.
우울증의 신체 증상, 꾀병이 아니다
위 사례에 등장하는 김예분 할머니는 자주 자녀들에게 전화를 걸어 “어디어디가 아프니 병원에 가야겠다”고 말하곤 했다. 할머니가 우울증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자녀들은 열심히 할머니를 병원으로 모시고 다녔다. 하지만 검진을 해도 이렇다 할 큰 병도 없었고, 이래저래 먹는 약만 늘어났다. 자녀들은 슬슬 할머니가 부담스러워졌다. 그러다가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으니 이게 다 우울증의 증상이라는 소견이 나온 것이다.
그럼 지금까지 할머니의 증상은 우울함에 못 이긴 할머니의 꾀병이었다는 것인가?
아니, 그렇지는 않다. 할머니의 몸은 실제로 아팠다. 할머니가 느꼈던 신체증상들은 꾀병이 아니라 우울증의 또 다른 얼굴이었던 것이다. 김 할머니는 자신의 신체증상을 통해 자녀들에게 “내가 우울하단다”라고 온 몸으로 호소하고 있었다. 물론 자신은 그런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 채 말이다. 다양한 신체증상은 할머니의 우울한 기분을 숨기기 위해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표현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다.
자신의 심리를 잘 표현하지 못하는 노인들에게서 우울증은 이러저러한 신체적인 증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런 증상은 병원에서 검진을 받아도 마땅한 병명이 나오지도 않는다. 때문에 어르신이 이유없이 신체적인 통증을 호소할 때는 자세히 그 말을 경청해 볼 필요가 있다. 노인들이 하는 언어적, 비언어적 표현 속에 자신도 모를 우울증을 숨겨놓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이 글은 대한신경정신의학회와 네이버가 함께 기획한 정신건강 특집 섹션에 실린 글입니다.
- 작성자: 정찬승 (마음드림의원 원장, 대한신경정신의학회 홍보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