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극복은 명령 아닌 협력으로

정찬승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재난정신건강위원회 홍보국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2014년 4월 세월호 침몰 사고로 온 나라와 전 세계가 충격에 빠졌을 때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심리치유를 위한 자원봉사자를 모집했다. 불과 며칠 내로 수백 명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이 나섰고 진료 중인 환자들에게 양해를 구해 진료실 문을 닫고 단원고에 찾아가서 학생과 가족, 교직원의 트라우마 회복을 위해 상담을 이어 나갔다. 어디 의사들뿐이랴. 무수히 많은 시민과 단체, 전문가들이 자원봉사를 위해 사고 현장과 안산시 등 피해 지역으로 달려가서 서로를 도왔다.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참여는 피해자와 시민들에게 큰 힘이 됐고 회복으로 가는 길을 열어줬다.

2017년 포항 지진 때는 여진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많은 의료인과 상담가, 봉사자들이 현장과 지역으로 달려가서 지진의 피해와 트라우마를 극복하도록 도왔다. 정신건강 전문가들은 정부에서 미처 구비해놓지도 않은 지진 트라우마 회복 지침을 만들어 상담 현장에서 사용하도록 즉시 배포하고 상담가들을 훈련시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는 어떠한가. 초유의 감염병 재난 앞에서도 의료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안위보다 환자의 생명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기피 현상이 심했던 대구로 수백 명의 의료인이 몰려가서 온 힘을 다해 진료했다. 우한시 교민들이 귀국해 격리시설에 입소했을 때 국가트라우마센터와 협력해서 심리적 안정과 회복을 도운 것도 정신건강 전문가들의 자발적 헌신이다. 연구와 강의가 곤란해진 상태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밤을 지새우며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감염병 심리사회방역지침을 제작해 준비 안 된 정부와 고통에 빠진 시민들을 위해 배포한 것도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다. 

세계 각국의 시민과 전문가는 재난을 당한 한국인들이 서로를 도우며 재난을 극복해나가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정(情)의 문화, 이웃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고 내 일처럼 나서서 도우려 하는 심성은 우리가 가진 무형의 자산이요 자랑거리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이 가진 전문성, 지식, 기술, 재능, 몸과 마음을 기꺼이 바쳐서 우리는 국난을 극복해 왔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덕분이다.

최근 정치권에서 내놓은 재난 및 안전 관리 기본법 일부 개정 법률안은 진심 어린 자원봉사를 강제 동원으로 변질시키려 하고 있다. 재난 관리를 위한 자재, 시설에 더해서 의료인 등 인력을 자원으로 격하해 비축, 지정, 관리 대상에 포함시켜 정부가 동원 명령을 내릴 법적 근거를 만들려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한 재난 극복을 저해할 것이 자명하며 사회의 안전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인권을 희생시킬 위험성이 다분하다.


의료인은 이미 충분히 헌신적으로 재난 극복을 위해 봉사해 왔다. 전문가와 의료인에게 필요한 것은 정부의 강제 명령이 아니라 협력과 지원이다. 사람을 자원 취급해 좌지우지하는 법안을 만들 것이 아니라 재난 극복을 위해 심신을 바친 봉사자와 전문가에게 적절히 보상하고 안전을 보장하고 피해와 후유증을 보상하는 지원 체계를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민간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면 정부 관료의 행정적인 명령을 내릴 것이 아니라 민관 협력 위원회를 구성해 서로 돕는 시스템을 구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람이 먼저라고 주장하려면 사람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 사람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물적 자원으로 취급하며 경시하는 것은 국가 권력의 갑질이다. 권력에 도취돼 공감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이 갑질의 시작이다. 이번 개정 법률안은 국가와 개인을 갑을 관계로 적시해 강제력을 행사하려는 갑질의 획책이다. 시민을 위한 봉사는 강제 동원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어야 한다. 사회의 안전과 개인의 존엄성이 함께 지켜질 때 우리는 재난을 극복할 수 있다. 국가는 시민과 전문가에게 명령을 내리려 하지 말고 협력을 청하라. 우리는 기꺼이 나설 준비가 돼 있다.

정찬승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재난정신건강위원회 홍보국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기사 원문: 동아일보 9월 23일 칼럼

https://n.news.naver.com/article/020/0003311018

정찬승 (융학파 분석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의학박사)
국제분석심리학회 정회원
대한신경정신의학회·대한정신건강재단 재난정신건강위원회 홍보국장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홍보위원장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신보건위원회 위원
울산대학교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교수
마음드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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