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2일: 한국분석심리학회 홈페이지 개편

한국분석심리학회 창립 40주년을 맞이하여 홈페이지를 개편했습니다.

누구나 모든 게시물과 자료를 볼 수 있도록 공개했으며, 홈페이지 회원 가입 절차는 폐지했습니다.

앞으로 학술지 자료를 업로드하고 학회의 역사 자료를 보완할 예정입니다.

공지사항 코너에는 한국분석심리학회, 한국융연구원, 한국융분석가협회에서 주관하는 행사와 회원에게 반드시 알려야 하는 중요 사항을 게시하겠습니다.

분석심리학 코너에는 분석심리학의 기초 개념과 핵심을 이루는 내용을 학술대회 초록을 중심으로 게시하겠습니다.

에세이 코너에는 한국융연구원의 뉴스레터 ‘길’지에 게재된 회원의 에세이를 게시하겠습니다.

한국분석심리학회 홈페이지가 인터넷의 바다에서 분석심리학의 기본을 담은 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 한국분석심리학회 홍보이사 정찬승

우리 안의 갑과 을 – ‘갑질’의 심층심리학적 이해

I. 들어가는 말

최근 대한민국에서는 우위에 있는 자가 하위에 있는 자에게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사건들을 소위 ‘갑질’이라고 칭하며, 이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높아지고 있다. 통상 계약의 당사자를 순서대로 갑(甲), 을(乙)로 지칭하여, 우위인 측을 갑이라 하고 상대방을 을이라 한다. 갑과 을이 계약을 맺음으로써 갑을관계가 형성되는데, 최근 들어서 갑을관계는 지위, 계급의 고하(高下)를 표현하게 되어서 현재는 대기업과 협력업체, 업주와 종업원, 상사와 부하직원, 고객과 서비스업 종사자, 교수와 제자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소위 ‘갑질’이란 갑을관계의 ‘갑’에, 좋지 않은 행위를 비하하는 접미사인 ‘질’을 결합한 말로서, 권력을 가진 자가 약자에게 행하는 부당행위를 지적하여 비난하는 유행어라고 볼 수 있다.

연일 뉴스와 인터넷 매체들을 통해 갑질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며 국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으며,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실에는 ‘갑질을 당했다’는 사람들이 빈번히 마음의 고통을 호소하여 상담과 치료를 받고 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의사로서 ‘갑질’ 현상에 대해서 심리학적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실감하게 됐다. 갑질에 대해 심리학적으로 고찰하려고 할 때, 그 시대의 다수의 구성원들이 공감하고 공유하는 유행어에는 집단 의식(Collective consciousness)이 반영되며, 또한 그 기저에는 각 개인의 개인적 무의식과 집단적 무의식이 관련되어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필자는 소위 ‘갑질’로 불리는 사회현상에 대해 임상에서 경험한 사례들을 고려하여 심층심리학적 측면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차원에서 이해하여 갑질이 발생하는 원인과 그 부정적인 영향을 해결할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II. 갑질의 사례와 유형

필자의 임상경험을 통해 수집한 갑질의 사례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지속적으로 약자를 얕잡아보고 힘과 권력을 이용해 부당한 행위를 반복하는 상습적인 갑질이며, 둘째는 평소 평등한 관계를 유지해오던 사람이 특정한 상황에서 돌변하여 부당한 권력을 휘두르려 하는 우발적인 갑질이다.

1. 상습적 갑질

상습적으로 갑질을 하는 자는 대부분의 인간관계, 사회적 상황에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약자를 굴복시키고 조종하려는 성향을 보인다. 공격적이며 오만하고 거들먹거리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고 타인이 복종하고 굴복할 때 만족감을 느낀다.

사례 A

대기업 브랜드의 하청을 받아 십여 년 간 제조공장을 운영하던 A 사장은 적극적이고 활기찬 사람이다. 그러나 본사의 담당 팀장이 매출 하락을 이유로 A 사장에게 일방적으로 계약해지를 통보했다. A 사장이 자초지종을 물었으나 본사의 팀장은 무례한 태도와 인격적인 모욕을 서슴지 않았다. A 사장은 본사의 매출 하락에 따른 계약 해지에 대해 납득은 했으나 담당 팀장의 안하무인의 빈정거리는 태도에 큰 충격을 받았다. A 사장은 분노에 휩싸였으나 점차 불안, 우울, 무기력에 빠져들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죽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사례 B

새로 임용된 젊은  여성 법조인 B는 최근 심한 우울감에 빠져들었다. 가라앉은 기분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젖어서 출근을 해도 정상적인 업무를 할 수 없었다. 검토해야 할 서류는 쌓여갔지만, 처리할 집중력이 전혀 발휘되지 않았고, 문서 작성에서도 실수가 잦아져 더욱 난처해졌다. B는 같은 부서의 중년의 남자 상사로부터 ‘시집은 언제 갈 거냐? 시집이나 빨리 가라’ ‘여자는 이래서 안된다’ ‘그거 하나 제대로 못하나?’는 등의 모욕과 비난을 들어왔다.

사례 C

중년에 된 C는 때때로 심한 우울감을 느끼고 아무런 의욕이 없어지는 상태가 되곤 한다. 그럴 때면 대학원 시절 지도교수와의 일이 떠오른다. 연구보다는 보직 등 권력에 관심이 많은 지도교수는 겉으로는 매우 신사적인 사람이었지만 내부에서는 권위적인 태도로 제자들을 착취했다. C는 어려운 가정환경에서도 학자로서의 미래를 꿈꾸며 힘든 과정을 견뎌냈다. 어느 날 지도교수와의 면담에서 지도교수로부터 모멸감을 주는 말투로 ‘천한 것들에게 잘해줘 봤자 은혜를 모른다.’는 말과 함께 학위를 줄 생각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C는 그동안 이용만 당했다는 억울함과 어려운 형편에도 최선을 다했던 그간의 열정이 무너져내리는 충격을 받았다. 학자로서 성공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었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에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우울감은 삶의 의욕을 꺾어버리곤 했다.

사례 D

공공단체의 팀장인 D는 공황장애와 우울증으로 진료실을 찾아왔다. D는 자신의 사생활도 없이 직장을 위해 헌신해온 매우 성실한 사람이다. 그러나, 1년 전 새로 부임한 상사는 비상식적인 업무지시와 인격적인 모욕, 협박, 막말과 욕설로 직원들을 몰아세웠다. D는 1년간 어떻게든 상사의 지시를 따르려고 했으나, 상사는 일관성 없는 태도로 고성과 욕설, 성적 모욕으로 직원들을 다그쳤다. 상사가 그렇게 한 이유는 직원들이 그 상사와 대등한 지위에 있는 다른 임원에게 충성하고 자신을 우습게 여긴다는 것이었다. D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고, 불안과 공황발작, 우울감에 시달리다가 자신이 젊음을 바쳐 성장시킨 그 기관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D를 몰아붙인 상사 또한 불면과 불안의 문제를 갖고 있으며 음주 문제 또한 심각했다.

2. 우발적 갑질

평소 평등한 인간관계를 맺어오던 사람이, 특정한 상황에서 폭발적으로 힘을 남용하려 하여, 본인과 상대 모두 예상 밖의 상황에 당황하게 된다. 갑질을 하는 상황에서 감정조절이 되지 않아 본인도 불안과 공포에 압도되어 몸을 떠는 등의 신체증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사례 E

상사로부터 심한 모욕과 비난을 들어온 E는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치료를 받고 있다. E는 퇴사 후 다른 직장에 취업을 하게 됐다. 새로운 직장으로 출근한 E는 자신의 부하직원들의 태도가 불손하고 자신을 우습게 여기는 것 같아서 몹시 불편했다. E는 자신이 이전 직장에서 상사에게 당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최대한 부하직원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주려고 노력했으나, 마음이 점점 불편해졌다. 어느 날 E는 부하직원들의 무례한 태도에 마구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며 비난했고 거칠게 몰아붙였다. 퇴근 후에도 E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고 부하직원들에 대한 분한 마음과 더불어 자신이 그토록 분개해온 이전 상사가 한 짓을 자신이 똑같이 저지른 것 같아 더욱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다.

III. 갑질의 심층심리학적 이해

상습적 갑질의 유형에서는 지속적으로 갑질이 일어나기 때문에 당한 사람은 심리적으로 만성적인 심한 스트레스를 경험하고 치료를 받기에 이르는 경우가 생긴다. 이때의 특징적인 임상양상 중 하나가 심한 무력감에 빠져서 의욕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상습적인 갑질을 가한 사람은 타인의 심적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이 현저히 낮은 점에서 반사회적 인격 특성을, 권력에 몰두하고 자기중심적인 점에서 자기애적 인격 특성을 고려할 만하다. 상습적으로 갑질을 하는 자는 자신의 행동이 문제가 있다는 반성적 인식이 결여되어 있어서 그 행위 자체에 대해 상담을 받으려고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갑질을 당한 사람이 저항하려고 하면 더욱 철저히 비하하고 짓밟으려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자신이 권력의 중심에 서지 못한 경우에는 불안과 우울, 불면 등의 증상을 겪고 치료를 받으러 병원을 찾는 경우가 있다.

우발적 갑질의 유형에서는 돌발적으로 갑질이 발생한다. 대개 일회성인 경우에 그쳐서 갑질을 한 사람도, 당한 사람도 진료나 상담을 받으러 오는 경우는 드물다. 임상현장에서 관찰할 수 있는 사례는 기존의 정신분석을 받던 사례가 경험하는 것인데, 가해자는 평소에 평등한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해왔고, 다소 내향적인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평소 조용하고 소심했던 사람이 갑자기 권력을 잡게 되거나 자신의 지위가 위협받는다는 생각이 들 경우 폭발적으로 분노하고 주위 사람들을 억압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주위로부터는 ‘그럴 사람이 아닌데…’ ‘원래 그렇지 않은 사람인데…’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경우가 많다. 본인 스스로도 놀라고 흥분해서 후회하거나 부끄러워하는 등 내적 갈등을 겪는다. 갑질을 당한 사람은 돌변한 상대방의 태도에 당혹감을 느끼고 신뢰가 무너지고 실망하게 된다.

– 권력 콤플렉스

상습적이든 우발적이든 갑질을 당한 사람은 압도적인 힘과 권력의 공격에 무너져 이후 의욕과 희망을 잃게 된다. 갑질을 한 사람도 뭔가에 홀린 듯이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른 후 자괴감과 우울, 불안에 빠지는 일이 흔하다. 이것은 모두 자아와 이질적인 어떤 무의식적인 심리학적 내용, 즉 콤플렉스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이다.

모든 인간은 무의식에 권력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 갑질을 하는 사람은 무의식적인 권력 콤플렉스와 자아를 동일시하거나 권력 콤플렉스에 의해 사로잡힌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객관적인 상황판단을 하기보다는 권력에 의해 모든 것을 판단한다. 특히 권력에 집중할수록 타인과 자신의 감정에 대한 인지가 현저히 떨어진다. 이는 건강한 자아기능을 손상시키고 신경증적인 상태에 처하게 된다. 칼 구스타프 융이 지적한 대로 권력에 대한 집착은 본인이 표현하거나 인식하기를 꺼리고 있는 지독한 열등의식의 과보상인 경우가 많다.

– 그림자의 투사

갑질의 상황에서 갑과 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둘 다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을 자주 본다. 갑은 을이 무능하고 게으르고 무책임하다고 비난하며, 을은 갑을 독재적이고 오만하고 폭력적이라고 비난한다. 둘 다 자신이 혐오하는 것을 상대방에게서 보고 비난한다. 이것은 자신의 무의식에 억압된 열등한 인격인 그림자상을 상대방에게 투사하는 현상이다. 투사는 혐오스러운 인격이나 부도덕함이 자신에게는 없고 남에게만 있다고 생각하는 자기방어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그림자가 자신의 무의식에 있다는 것을 의식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 갑질의 목적의미

과연 갑질의 등장이 나쁘기만 한 것인가? 갑질은 앞에서 살펴보았든 ‘힘’을 부당하게 사용하는 것을 비하하는 유행어다. 우리는 갑질이라는 유행어를 통해서 현재 한국사회에 만연한 불평등을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상호 간에 그림자 투사를 통해서 각자의 내면에 억압되어 있는 그림자를 인식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주목해야 할 것은 갑질의 피해자인 을은 분노에 떨면서도 한없는 무력감에 빠져서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의욕을 잃은 상태가 지속된다는 점이다. 실제 정신분석을 하면 초기에는 갑질을 당한 사람의 꿈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서와 같이 반복적으로 갑질을 당하는 상황이 등장한다. 그러나, 정신분석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공격적이고 가학적이기만 했던 꿈 속의 갑이 손을 내밀어 화해와 협력을 청해 오는 경우가 있다. 이를 계기로 피분석자는 기력을 회복하고 삶에 적극적으로 뛰어든다. 이는 자신의 무의식의 그림자와 권력 콤플렉스를 의식화하는 작업과 관계가 있다. 이것은 소심하고 무력한 자에게 자신의 무의식의 힘을 의식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인간은 갑과 을이라는 이분법으로 구분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자신을 전적으로 갑 또는 을에 동일시할 경우에 심각한 신경증이 발생한다. 우리는 내면에 갑과 을 모두를 가지고 있다. 갑질에 대해 반성하는 것은 좋으나 그것을 멸시하고 금기시하는 것만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갑질은 모든 사람의 무의식의 힘, 권력을 발견하고 그것을 건강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인식의 기회를 제공해준다.

– 갑질의 심층심리학적 해결방안

갑질을 척결하여 해결할 수는 없다. 많은 한국인이 자신을 을로서 피해자라고 생각하여 갑질이라는 유행어가 탄생했지만, 피해의식에 사로잡히면 모든 인간관계를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구도로 왜곡하게 된다.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갑과 을이 공존한다. 이를 인식하여 자신의 힘과 권력을 건강하게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

갑질은 기본적으로 독재자나 폭군과 같은 권력의 오남용이다. 권력의 우위에 있는 자는 당연히 이런 갑질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열세에 있는 자는 자신이 당해야만 할 뿐 다른 방법은 없다는 무력감에 젖어 있다. 여기에는 지위고하에 대한 뿌리 깊은 계급의식이 내재해 있다. 집단이 구분하는 계급만 보일 뿐 각각의 개인의 고유한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평등의식이 결여되었을 때 갑질이 나온다.

갑질은 사회적 문제로서 올바른 평등의식을 심어주는 교육을 통해 우선 해결해야 한다. 계급의식을 버리고, 약자를 배려하며, 각 개인의 개성과 존엄성을 존중하는 교육, 힘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현대의 갑질은 무엇보다도 돈과 관계가 깊다. 현대의 배금주의적인 문화의 개선이 시급히 요구된다.

개인의 치료에 있어서는 갑과 을의 이분법적 접근을 경계해야 한다. 누군가가 마음의 치료를 받고자 할 때 그는 단지 ‘갑질’ 등 하나의 문제만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 전체를 가지고 치료자 앞에 마주 앉는다. 갑질은 하나의 계기일 뿐이다. 부모와의 갈등, 워커홀릭으로 자신을 잃어버린 생활, 뿌리 깊은 열등감, 어린 시절부터의 상실의 반복 등 모든 개인적 과거사와 함께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하는 인생의 문제를 들고 온다.

그런 사람을 갑이나 을, 하나로 규정하는 것은 그 사람의 내적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이다. 치료자는 그의 무의식에 접근하여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의식의 인식의 범위를 확장시켜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도록 해주어야 한다. 을의 마음 속에 갑이, 갑의 마음 속에 을이 숨어 있음을 발견하는 것은 무척 고통스럽고 피하고 싶은 일이지만, 우리가 그림자를 외면하고 타인에게서만 그것을 찾으려고 하는 이상 우리는 상호비방과 증오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림자를 직면하고 의식화할 때 그는 갑과 을의 종속관계를 뛰어넘어 독립적인 온전한 인격체가 될 수 있다.

글 _ 정찬승 (융학파 분석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의학박사)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신보건위원회 상임위원
대한신경정신의학회·대한정신건강재단 재난정신건강위원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이사
보건복지부 중앙정신보건사업지원단 재난정신건강정보센터 연구원
울산대학교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교수
마음드림의원 원장
http://maumdream.com

첨부파일: 제 4회 정신건강정책포럼 자료집_발췌

  • 이 글은 중앙정신보건사업지원단의 주최로 2016년 6월 30일 국립정신건강센터에서 열린 ‘2016년도 제4회 정신건강정책포럼 “갑을관계”_일상에서의 상처와 트라우마’에서 발표된 내용입니다.
  • 첨부파일은 포럼의 자료집 중 해당원고만을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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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자료집은 중앙정신보건사업지원단 홈페이지에 가입 후 다운로드 받을 수 있습니다.

공부하는 즐거움 (국제학술대회 참석후기)

제 7회 분석심리학과 중국문화 국제학술대회가 2015년 10월 21일부터 23일까지 마카오 시립대학에서 ‘Confronting Collective Trauma: Archetype, Culture and Healing’을 주제로 열렸다. 국제분석심리학회, 국제모래놀이치료학회, 마카오 시립대학, 동방심리분석연구원이 공동 주최하고 마카오 재단에서 후원하는 학술대회였다. 나는 발표를 맡은 이부영 선생님, 이주현 선생님과 함께 학술대회에 참석하고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이번 학술대회 참석의 계기는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4년 4월 16일에 발생한 세월호 침몰 사고로 우리나라 국민은 물론이고 세계 각국에서 슬픔과 애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정신건강 전문가들이 일선으로 달려가서 감당하기 힘든 압도적인 심리적 트라우마의 치유에 힘을 썼다. 특히 융학파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은 재난에 대한 심리적 대응의 정책 수립과 현장 지원, 피해자와 유가족에 대한 상담에 자원하여 재난의 현장을 직접 체험했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와 유가족, 일반인, 그리고 치료자들까지 의식과 무의식에 깊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트라우마 자체의 해결에 더하여 무의식의 콤플렉스의 작용을 연구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부영 선생님의 지도 아래 김지연 선생님, 이주현 선생님, 그리고 나는 ‘재난과 심혼’ 연구회를 조직하여 2015년 2월 8일 제1차 연구회의를 시작으로 매월 1회 재난과 인간의 심혼에 대한 역사적 자료와 신화, 민담, 꿈 자료 등을 수집하여 분석하는 연구작업을 진행해왔다. 열띤 토론과 지도를 통해 고대로부터 인류가 겪어온 재난의 심리적 의미에 대해 깊이 고찰했으며, 현대의 재난 피해자와 치료자에게 분석심리학적 접근이 큰 가치가 있음을 깨닫게 됐다.

마침 ‘집단적 트라우마’를 주제로 하는 분석심리학 관련 국제학술대회가 열려 연구성과를 종합하여 체계화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 참석과 발표를 결정했다. 안타깝게도 김지연 선생님은 개인 사정으로 불참했지만, 그간 연구성과를 집약하여 원고를 작성해주셨기에 내가 학술대회에서 대독하는 것으로 했다.

우리 일행은 2015년 10월 20일 인천 국제공항에서 만나 여정에 올랐다. 나는 국제분석심리학회가 주관하는 학술대회에는 처음 참석했지만, 이부영 선생님께서 주요 임원들과 학회의 역사에 대해 사전에 잘 설명해주셔서 흐름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마카오 공항에 도착하니 마카오 시립대학의 대학원생들이 진행요원으로 나서서 친절히 안내해준 덕에 무사히 학회장을 찾아갔다. 환영연에서는 마카오 시립대학의 총장인 Yan Zexian의 환영사를 시작으로 한국 분석심리학회와 인연이 깊은 Tom Kirsch, Murray Stein 등의 분석가들의 인사가 이어졌다. 한국에 와서 강의한 적이 있는 John Beebe를 포함해 Joe Cambray 등 외국의 분석가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사실 국제분석심리학회에 처음 얼굴을 내민 나와 이주현 선생님으로서는 이런 환대를 기대하기 어려웠으나, 외국의 분석가들의 이부영 선생님에 대한 존경은 대단하여 그 뒤에 서있기만 해도 많은 인사를 받을 수 있었다. 학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날인 20일의 환영연은 다채로운 공연과 음악, 와인과 다과로 흥이 넘쳤다. 그 행사를 주관한 인물은 마카오 시립대학의 Shen Heyong인데, 분석심리학의 보급과 국제교류에 매우 열성적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21일 아침의 개회식은 중국다운 으리으리한 음악과 화려한 영상, 귀빈들에게 선사하는 꽃다발로 시작됐다. 학술대회라기보다 축제라고 할만한 흥겨운 개회식이었다. 다음으로 문화적 트라우마, 폭력, 그 치료에 대해 Murray Stein이 강의했고, 역경(易經)에 대한 강의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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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eventh International Conference of Analytical Psychology and Chinese Culture 개회식

오후에는 국제분석심리학회에서 최초로 수련생들이 발표하는 자리가 ‘The First Students (Routers) Forum of Analytical Psychology and Eastern Culture’로 마련되었다. 나와 이주현 선생님, 그 자리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김지연 선생님이 외국의 다른 수련생들과 함께 발표했다. 세 명의 발표가 한 주제에 걸쳐 이루어진 만큼 큰 제목은 ‘Disaster and Psyche in Korean Culture’로 정했고 3부로 나누었다. 나는 그중 한국의 재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를 ‘part 1. Disaster in Korean Culture in Historical Perspectives’의 제목으로 발표했다. 김지연 선생님은 ‘part 2. Dealing with Disaster in Myths and Folktales – in Search for  Cultural and Archetypal Patterns’을 제목으로 신화와 민담에 나타난 재난의 원형에 대해 정리해주었고 내가 김지연 선생님의 사진을 보여주고 대독했다. 이주현 선생님은 ‘part 3. Experiences of Jungian Psychiatrists in Crisis Intervention on Sewol Ferry Disaster April 16, 2014 –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Archetypal Constellations in Dreams’를 제목으로 하여 피해자와 유가족, 치료자의 꿈 자료를 수집하여 분석한 내용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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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aster in Korean Culture in Historical Perspectives 강연

세 강연을 마치자 많은 분석가들이 큰 관심을 표시했다. 특히 국제분석심리학회의 현 학회장인 Tom Kelly는 재난 현장에서 정통적인 분석심리학적 접근이 이렇게 훌륭하게 이루어졌고 실질적인 도움이 됐다는 데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우리나라에 친숙한 San Francisco의 John Beebe는 이주현 선생님과 꿈의 의미에 대해 깊이 토론하며, ‘한국의 동료들이 강연하는 것을 보니 분석심리학의 미래가 밝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극찬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22일 오전에는 Tom Kirsch가 ‘트라우마 경험과 회상’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이 체험한 내용을 강연했는데, 출산 과정에서 상완골이 골절된 것으로 시작하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런던 폭격 현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일, 여러 가지 암에 걸리고 치료받으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여전히 무의식의 메시지에 귀 기울이는 모습이 감명 깊었다. Tom Kirsch는 프로이트가 트라우마 이론을 세웠지만, 융은 트라우마를 그렇게 강조하지 않았다는 점을 거론하며, 자신이 그토록 많은 소위 트라우마 경험을 갖고 있지만, 정작 젊은 시절 분석을 받을 때에 자신의 어린 시절의 충격적인 경험들에 대해 그리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해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다. 또한 분석가가 된 후에도 피분석자들과 트라우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지는 않는다고 했다. Tom Kirsch는 여러 장소와 시기에 겪은 트라우마들이 자신의 내면에 있으며, 그것들이 자신을 다문화적 인간으로 만들었다면서 트라우마의 목적의미에 대해 말했다.

이어서 이부영 선생님이 ‘Neo‐Confucian Concepts of 4 Beginnings and 7 Feelings: A consideration from Jungian Psychology’의 제목으로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의 분석심리학적 고찰을 강연하셨다. 퇴계와 율곡, 융의 사상을 비교하여 많은 청중들이 그 깊이와 통찰에 큰 감명을 받아서 강연 후 따로 찾아와서 질문을 하고 원고를 받을 수 있는지 요청하는 분석가들이 많았다. 이부영 선생님에 대한 세계 분석가들의 존경심은 그 철저한 학문적 태도와 작업에 있다는 걸 실감했다.

점심시간에는 한국의 참석자들이 모여 마카오의 전망 좋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며 성공적인 발표를 자축하는 자리를 갖기도 했다. 저녁에는 만찬에 참석하여 세계 각국에서 온 참가자들과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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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영 선생님과 함께

마지막 날인 23일 오전에는 일본의 Toshio Kawai가 ‘Cultural Trauma and Treatment’라는 제목으로 정신분석가인 선친과 그 형제들이 일본의 침략전쟁에서 받은 트라우마에 대해서 장황하게 얘기했다. 나는 그가 동일본 대지진으로 트라우마를 겪은 피해자와의 정신분석 작업을 통해 경험한 내용과 그들의 무의식에 대해 강연하기를 기대했는데, 자신의 이야기도 아닌 선친의 경험과 일본의 침략전쟁에서 자신들을 피해자로서 외부에 표현하려는 태도에 대해 무척 실망했다.

학회 기간 내내 중국의 학생들과 학자들은 대단한 열의를 보이며 강의를 흡수했다. 그들은 중국 내의 정신건강 문제의 심각성과 그 해결책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으며 진지한 태도로 분석심리학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들보다 분석심리학을 먼저 접하고 연구하게 된 사람으로서 큰 책임감을 느꼈다. 학술대회가 치러지는 동안 주최 측은 강연자와 청중을 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동시통역을 제공하여 영어가 능통하지 않은 중국의 청중에게 분석심리학을 철저히 교육하고자 하는 의지가 대단함을 느꼈다. 원로 분석가들을 인터뷰하여 시청각 자료를 확보하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나는 중국인들의 순수한 열의에 감동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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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분석심리학회 회장 Tom Kelly(윗줄 왼쪽에서 두 번째), 차기 회장 Marianne Müller(윗줄 가운데)와 함께

학술대회를 모두 마친 후에는 마카오를 둘러보는 기회를 가졌다. 흔히 도박의 도시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오랜 식민지로 이색적인 문화와 풍경을 갖고 있는 도시다. 특히 천주교 성지가 곳곳에 있으며, 김대건 신부가 신학생으로 유학을 한 곳이다. 불야성을 이루는 카지노보다도 소박하고 오밀조밀한 거리와 유적이 무척 마음에 드는 도시다.

한적한 카페에 앉아서 이부영 선생님과 학술대회에서 경험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Tom Kirsch와 Toshio Kawai를 비교하며 후자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얘기했는데, 이부영 선생님의 대답은 의외였다. Toshio Kawai는 자신이 경험한 것을 말해야 했기 때문에 선친과 그 형제들의 트라우마를 얘기한 것이며, 또한 피해자든 가해자든 트라우마에 집착하는데, 정말 그런 게 있느냐는 것이다. 나는 그 말씀을 듣고 마음이 더욱 불편해졌다. 내 콤플렉스를 건드린 것이다. 한참을 곰곰 생각해보니 그것은 내 무의식의 투사 때문에 일어난 감정이었다. 나는 실제로 일본의 침략을 경험하지 않았다. 그것이 내 개인의 트라우마가 될 리가 없었다. 오히려 내 무의식의 파렴치한 가해자와 처량한 피해자의 원형이 일본과 한국에 투사된 것이다. 이 깨달음은 이후에 내 진료와 분석에 큰 도움이 되었다. 피해의식은 사람을 사로잡는 강력한 콤플렉스다. 그 콤플렉스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언제나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로 세상을 왜곡하게 된다. 나는 이 부분이 이번 학술대회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 융이 트라우마 심리학, 즉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현재의 심리적 고통을 설명하려는 태도를 환원적이고 인과론적인 태도라며 비판했다는 점을 상기하게 됐다. 오히려 현재 그 사람이 겪고 있는 문제가 중요할 수 있다. 트라우마는 비극이지만, 그 안에는 우리를 성숙한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목적의미가 있다. 트라우마의 고통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고통의 의미이며, 치료자는 그것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사람인 것이다.

학술대회에 참석하고 강연하는 일은 무척 부담스럽다. 하지만,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리고 많은 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새로운 자극과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시적이고 낭만적인 수준의 강연을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무의식에 대한 진지하고 철저한 탐구의 자세이며 그런 태도를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무의식에 접근할 수 있다. 이번 학술대회 참석은 공부하는 즐거움을 가르쳐준 소중한 기회였다. 바쁘신 와중에도 세심하고 철저하게 연구모임을 지도해주신 이부영 선생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 이 글은 한국융연구원 소식지 ‘길’에 투고한 원고를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학회명: The Seventh International Conference of Analytical Psychology and Chinese Culture
주제: Confronting Collective Trauma: Archetype, Culture and Healing
일시: Oct. 21 -23, 2015
장소: City University of Macau, Macau, People’s Republic of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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