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세원 교수님을 추모합니다

고 임세원 회원의 의사자 지정 불승인에 대한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입장

❍ 보건복지부 의사상자심의위원회가 고 임세원 교수의 의사자 지정을 승인하지 않았다는 너무나도 안타까운 보도와 관련하여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전합니다.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동료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한 고인의 숭고한 뜻이 의사자 지정을 통해 기억되고 함께 지속적으로 추모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 자신을 희생하고 동료를 살린 임세원 교수는 반드시 의사자로 지정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의사들에게 어떻게 살라고 이야기해야 합니까?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는 상황이 생기면 동료를 무시하고 본인의 생명만을 우선 챙기라고 해야 할까요? 승객을 버려두고 혼자서만 탈출하는 침몰선의 선장처럼 자신만 탈출하라고 해야 할까요? 희생을 인정받기 위해, 의사로서 칼을 든 피의자와 목숨을 건 몸싸움을 해야만 희생과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 2018년 12월 31일 한해의 마지막 날 가방에 칼을 숨긴 피의자가 예고 없이 병원을 찾아왔습니다. 유가족이 제공한 법원 기록에 따르면 피의자는 병원, 기업, 국가가 자신의 뇌에 소형폭탄 칩을 심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고 이와 관련된 여러 사람을 해치겠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 2019년 1월 2일 서울 종로경찰서는 “임 교수가 진료실 문 앞 간호사에게 ‘도망치라!’고 말하고 본인은 반대편으로 도피했다”며 “가다가 간호사가 피했는지 확인하려는 듯한 모습으로 서서 간호사를 바라봤고, 피의자가 다가오자 다시 도피를 시작했다. 간호사를 대피시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볼 수 있는 모습이 CCTV에 포착됐다”라고 설명했다고 여러 언론을 통해 보도된 바 있습니다. 임세원 교수의 죽음을 무릅쓴 숭고한 희생에 감동한 수많은 국민, 동료 의료인, 언론인, 국회의원 등이 여러 언론 매체와 인터넷 매체에서 고인의 의사자 지정을 촉구했습니다.

❍ 고 임세원 교수는 자신을 찾아온 환자분들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겪고 있는 분들이며 ‘이것이 나의 일이다’라고 다짐하며 환자분들과 힘겨운 치유의 여정을 함께 한다는 글을 남긴 바 있습니다. 임 교수는 자신의 진료를 ‘전력투구’에 비유할 정도로 막중한 책임감을 가졌습니다. 임 교수의 책임감은 그의 마지막 진료까지 이어졌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에 예약 없이 불쑥 찾아온 환자를 돌려보내지 않고 의사로서 책임을 다했습니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가 유가족을 통해 받은 법원 자료 등에 따르면, 오후 5시 39분에 피의자가 진료를 받기 시작했고 불과 3분 만에 임세원 교수가 간호사에게 신호를 보냅니다. 1분 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임 교수가 옆방으로 이동했고 이때 외래 간호사가 진료실 문을 열자 임 교수가 ‘도망가’라고 소리치며 외래 간호사의 반대 방향으로 뛰어나갑니다. 바로 뒤따라 나온 피의자는 좌측의 외래 간호사에게 칼을 휘둘렀고 불과 50센티 정도의 차이로 칼을 피하게 됩니다. 이때 임 교수는 간호사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며 발길을 멈추었고 간호사 스테이션을 향해 “빨리 피해! 112에 신고해!”라고 소리칩니다. 이 외침에 피의자는 임 교수 쪽으로 방향을 돌려 추격하기 시작하고 이후 참혹한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불과 10초 후 보안요원이 도착하였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습니다.

❍ 의사자란 직무 외의 행위로써 구조행위를 하다가 사망한 사람으로 정의합니다. 구조행위는 자신의 생명 또는 신체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급박한 위해에 처한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행위를 말합니다.

❍ 피의자에게 흉기로 위협받는 밀폐된 방은 이미 진료 현장이라 부를 수 없는 범죄 현장입니다. 임세원 교수는 흉기로 생명을 위협당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생명보다 간호사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임세원 교수는 1) 방을 나오면서 간호사가 있는 쪽으로 피하지 않고 반대편으로 피했고 2) 본인의 안전을 우선 생각하여 계속 뛰지 않고, 멈추어 뒤를 돌아보아 위험에 처한 간호사의 안전을 확인했고 3) 멈추어 다른 간호사에게 ‘빨리 피해! 112에 신고해!’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소리는 피의자가 간호사를 해치는 행동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고 다시 임 교수를 쫓게 한 신호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지키려는 달음질을 멈추어 뒤를 돌아보고 동료에게 대피하고 구조를 요청하라고 소리친 행동이 매우 짧은 시간 동안 신속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의사상자심의위원회는 고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위협받는 순간 타인의 안전을 지키려 한 이 찰나의 행동이 생사를 갈랐습니다. 보안요원의 출동 시간을 고려할 때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 피했다면, 적어도 본인은 안전했을 것이지만, 다른 사람이 희생당했을 수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 위기상황에 있었던 동료 간호사는 의사자 신청을 위한 진술서에서 “만약 저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 피하셨더라면 이런 끔찍한 상황을 모면하셨을 텐데, 본인이 위급한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주변 동료를 살피시다 사고를 당하셨으므로 의사자로서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당시 사건 현장에서 도움을 받았던 다른 동료 직원들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 고 임세원 교수의 ‘생명을 지키는 의료인’으로서의 책임감과 그에 따른 의로운 행동은 많은 동료 의료인, 예비 의료인 그리고 국민들의 마음에 슬픔을 넘어 희망과 신뢰의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또한 임 교수를 잃고 누구보다 큰 고통을 겪고 있던 유가족들은 경찰을 통해 임 교수의 숭고한 희생을 알게 된 후, 참혹하고 비통한 상황에서도 환자에 대한 고인의 사랑을 이어받아 ‘안전한 진료환경’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편견과 차별 없이 쉽게 치료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달라는 메시지로 고인의 유지로 밝히고 조의금으로 들어온 1억 원을 기부하는 등 우리 사회에 깊은 울림을 주셨습니다. 임세원 교수의 의사자 지정을 위해 부인께서 전한 메시지를 다시 한번 전합니다.

“저희 가족이 남편을, 아빠를 황망히 잃게 되었으나, 그래도 남편이 그 무서운 상황에서도 간호사나 다른 사람들을 살리려 한 의로운 죽음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지지 않고 의사자로 지정이 되면 저희 가족, 특히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가는 데 힘이 될 듯합니다.”

❍  고 임세원 교수의 발인 날 고인의 어머님께서는 “우리 세원이, 바르게 살아줘서 고마워!”라고 마지막 인사를 전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CCTV에 녹화된 희생 영상을 봐야 했던 저희의 마음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웠습니다. 한편 누구보다 이 영상을 보기 힘들었을 유족들이 어떤 마음인지 감히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의사자 인정 여부가 사회적 논란이 될까 유족도 염려하신 줄 압니다.  마지막 찰나의 순간까지 바르게 살기 위해 애쓴 고인을 우리가 의사자로 기억하고 오래오래 추모할 수 있기를, 그 희생이 각박한 우리 사회에 등불이 될 수 있기를, 그리고 이를 통해 유가족분들의 고통과 아픔을 사회가 위로할 소중한 기회가 마련되기를 기원하며 대한신경정신의학회도 최선을 다해 지원하겠습니다.

  • 이 글은 임세원 교수를 추모하고, 보건당국이 그 숭고한 희생의 의미를 인정하기를 촉구하기 위해 대한신경정신의학회가 발표한 입장문입니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 2019년 춘계학술대회 심포지엄 ‘슬픔과 극복’에서 ‘의료와 폭력’ 제하로 강연

2019년 4월 11일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춘계학술대회 심포지엄 ‘슬픔과 극복’에서 ‘의료와 폭력’ 제하로 강연했습니다.

장소: 서울 그랜드 힐튼 서울 호텔

4월 11일(목)

컨벤션 B Symposium 10
14:00-15:30 슬픔과 극복
좌장: 권준수 (서울의대), 박용천 (한양의대)
14:00-14:20 경과 보고 이유진 (서울의대)
14:20-14:40 임세원교수의 업적 백종우 (경희의대)
14:40-15:00 의사나 의료진에 대한 폭력의 국내외 경험 정찬승 (마음드림의원)
15:00-15:20 향후대책 및 임세원 교수 희생정신의 계승 오강섭 (성균관의대)
15:20-15:30 질의 응답

관련 기사:

의료인 폭행은 환자 안전과 직결…미국은 가중처벌,영국은 무관용 원칙 메디게이트뉴스. 2019.04.12.

임세원 교수 잃은 슬픔 극복하려 애쓰는 정신과 의사들 청년의사 2019.04.12.

[한국일보-대한신경정신의학회 공동 기획] ‘한국인은 불안하다’ ⑩ 마음속 울화가 엉키고 맺혀 생기는 화병, 속 깊은 대화로 치유해야 – 정찬승 마음드림의원 원장

마음속 울화가 엉키고 맺혀 생기는 화병, 속 깊은 대화로 치유해야

[한국일보-대한신경정신의학회 공동 기획] ‘한국인은 불안하다’ ⑩정찬승 마음드림의원 원장

경직된 표정의 중년 여성이 가슴이 터질 것처럼 답답하고 묵직한 덩어리가 치밀어 오른다면서 진료를 받으러 왔다. 몸의 불편함을 호소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슬픔과 설움이 가득했다. 전형적인 신체증상을 동반한 우울증 또는 화병의 증상이었다. 게다가 사람이 많은 곳을 매우 두려워하는 광장공포증과 마치 죽을 것 같은 불안이 반복되는 공황발작까지 겪고 있었다.

남편과 사별한 그녀는 이미 성인이 된 자녀들이 독립하자 홀로 외로이 지내다가 우연히 한참 젊은 남성을 만나서 재혼했다. 그 남성에게는 중학생 딸이 있었다. 가까운 곳에 사는 시어머니는 낯선 살림에 적응하는 그녀를 물심양면 도와주었다. 이렇게 별문제가 없어 보이는 피상적인 상황만 말하던 그녀는 최근에 반복해서 꾸는 꿈을 들려주었다.

“꿈속에서 나는 남편과 침대에 누웠어요. 그런데, 어느새 남편의 전처도 함께 누워 있다는 걸 알았죠.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깨어났어요.”

사정을 자세히 묻자 그녀는 마음을 열고 쌓여 있는 울분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집안에 전처의 흔적이 너무 많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남편이 전처와 함께 잤던 침대도 그대로일 뿐 아니라, 중학생 딸은 늘 친엄마와 비교하며 새엄마를 밀어냈다. 어쩌다 딸이 친구를 집에 데려오기라도 하면 그녀는 숨죽인 채 방 안에 숨어 있어야 했다. 시어머니의 세심한 도움의 뒤편에는 새 며느리에 대한 불신과 친손녀에 대한 강렬한 집착이 깔려 있었다.

그녀는 일본인이었다. 일본에 출장 온 한국인 남성을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을 결심하고 바다를 건너 한국에 왔지만 그녀의 자리를 찾기에는 힘에 부쳤다. 한국의 유별난 시어머니도, 예민하기 그지없는 중학생 딸도 모두 그녀를 힘들게 했다. 나는 그녀에게 당장 침대부터 바꾸라고 했다. 그런 불쾌함과 설움을 참고 지내면 마음속에 울화가 쌓여 병을 만들기 때문이다.

꿈에 나타난 침대 위의 전처는 현실적으로 내쫓아야 할 적이지만, 무의식의 의도를 깊이 이해하자면 결국 그녀와 합해져야 할, 그녀가 애써 외면해오던 한국의 여성상을 의미한다. 그녀는 일 년이 넘도록 한국어를 한마디도 배우지 않고 지내왔다. 짓눌린 분노의 수동적 표현이었던 셈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이제 이 땅, 이 집안의 사람으로 자리를 잡으라”고 조언했다. 그녀는 다문화센터에 다니며 한국말을 배우고 일본인 친구도 사귀어 외로움을 달랠 수 있게 됐다. 용기를 낸 그녀가 새엄마를 무시하고 대화를 회피하던 딸을 앉혀 놓고 솔직한 심정을 얘기하자, 딸도 자신의 불만을 터뜨렸다.

힘들더라도 진실한 감정이 통하자 마침내 딸은 그녀를 ‘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시어머니의 불편한 도움도 정리했다. 처음에는 소란스러운 충돌이 있었지만, 곧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녀는 마음속 깊이 억압된 화를 풀어냄으로써 울분을 해소하고 새로운 가정을 더욱 단단히 할 수 있게 됐다.

현대의 수많은 정신건강 전문가들이 화를 다스리는 방법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다. 화를 참는 방법, 화를 없애는 방법, 애초에 화가 나지 않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마치 화가 아무 쓸모 없는, 문제만 일으키는, 감당하기 어려운 애물단지 감정인 것처럼 취급하는 것 같다. 그러나, 화는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원초적인 감정이다.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감정이라고 해서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화가 나는 것을 잘 처리하지 못해서 오랫동안 몸이 아파 누워 있거나 기운을 쓸 수 없는 상태를 화병이라고 한다. 정신의학적 용어로 바꿔 말하면, ‘심한 신체증상을 동반한 우울증’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에 따라 다양한 감정 표현이 있다. 그러나, 그 중심의 심성은 인류 공통의 것이다. 인종과 국가를 막론하고 부당하게 억압된 화는 마음의 병을 만든다. 화병은 마음속에 울화가 엉키고 맺혀서 생기는 병이다. 엉키고 맺힌 것은 풀어내야 한다.

애먼 사람에게 화풀이를 할 것이 아니라 정성껏 화를 풀어내야 하는 것이다. 스스로 하기 어렵다면 옆에서 도와주면 된다. 공감과 이해, 속 깊은 대화는 마음의 병이 된 화를 풀어내는 가장 좋은 치유법이다. 건강하게 표현된 화는 인생을 가로막은 문제를 해결하는 강력한 추진력이 된다.

  • 대한신경정신의학회와 한국일보가 공동으로 기획한 ‘한국인은 불안하다’ 시리즈 중 2018년 8월 7일 한국일보에 실린 에세이를 일부 수정했습니다.

글 _ 정찬승 (융 학파 분석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의학박사)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신보건위원회 상임위원
대한신경정신의학회·대한정신건강재단 재난정신건강위원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이사
보건복지부 중앙정신보건사업지원단 재난정신건강정보센터 연구원
울산대학교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교수
마음드림의원 원장
http://www.maumdream.com

 

2018년 6월 16일: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신보건위원회 운영회의 참석

2018년 6월 16일 토요일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신보건위원회 운영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위원들의 전문성이 높아서 늘 배운다는 마음으로 참석하고 있습니다. 모두 여러 일정으로 바빠서 토요일인데도 조찬회의를 할 수 밖에 없으니, 시민의 정신보건을 위한 열정과 헌신이 감탄스럽습니다.

2018년 1월 10일: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신보건위원회 운영회의 참석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신보건위원회 2018년 첫 운영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시민들의 정신건강증진을 위한 공공 영역 서비스와 정책 업무를 위한 위원회입니다.

일시: 2018년 1월 10일 수요일

장소: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사랑하는 나의 동료들. 학회와 시민을 위해 묵묵히 헌신하는 동료들을 만난 것이 근년의 큰 기쁨이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신보건위원회 2018년 첫 운영회의를 마치고.

10월 21일: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추계학술대회 강연

2017년 10월 21일 토요일에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 “정신치료의 세계: 자기실현과 삶의 질 향상” 제하의 강연을 합니다.

다음은 초록 중 일부를 발췌한 내용입니다.

“… 융 학파의 견지에서 분석대상은 ‘병’이나 ‘환자’가 아닌 한 개체의 존재, ‘그 사람’Person이다. 분석은 우울증, 불안장애 등의 특정 질병의 치료를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분석을 받는 사람의 자기실현을 통해 보다 성숙한 정신성을 획득하는 데 목적을 둔다. 이는 분석이 정신병리의 범주 안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분석을 받는 피분석자의 전체 인격을 대상으로 함을 의미한다. 분석은 의학적 범주에 속하는 ‘치료’를 넘어서 그 개인이 자신의 전체가 되도록 무의식을 의식에 동화시키는 작업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체계적 임상진단, 적응증, 금기, 예후 등의 의학적 접근방식을 버리고 철저히 분석대상 개인의 의식, 무의식에 맞추어 개별적으로 접근하는 과정이다. 실제로 신의 본질을 탐구하는 종교인, 창조성을 찾고자 하는 예술가,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젊은이,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노인들이 분석을 받고 있으며, 이들을 환자로 지칭하거나 분석을 의료행위로 국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

세계보건기구 서태평양지부 전문가그룹회의 참석을 마치고

2016년 1월 13일 수요일, 방배동의 아담한 진료실에서 오전 진료를 마친 나는 펄펄 내리는 눈을 헤치며 조심스레 운전을 하여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서 만난 박한선 선생은 멋진 카우보이 모자와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영락없는 인류학자였다. 우리는 공항 라운지에 마주 앉아서 이번에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 위치한 세계보건기구 서태평양지부 사무처에서 열리는 전문가그룹회의가 얼마나 중요한 일이며, 거기에서 우리가 어떤 성과를 거두어야 하는지에 대해 한참 의논했다. 이번 회의는 일본의 국립정신신경연구센터의 Yoshiharu Kim이 주도하여 세계 각국의 재난과 트라우마에 관한 정신건강 전문가들을 마닐라로 초청한 것이다. Yoshiharu Kim은 재일교포 3세로 일본의 심리적 트라우마 치유의 국가적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한국의 재난정신건강 분야의 발전을 위해 많은 배려와 지원을 아낌없이 제공해 왔다. 이번 회의는 재난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회복하기 위한 기법과 정보통신기술을 개발하고, 2016년 5월에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개최되는 세계 인도주의 정상회의에 상정할 제안문을 준비하는 것이 목적이다. 나와 박한선 선생은 정신건강기술개발사업단의 ‘재난정신건강지원 정보 콘텐츠 및 플랫폼 개발’ 연구과제를 담당하고 있다. 우리는 이번 회의를 통해서 세계적 동향을 파악하고 우수한 인적 네트워크를 확보하여 교류와 협력을 이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늦은 밤에 도착한 마닐라 국제공항에는 필리핀 중앙경찰청에서 근무하는 친구 Lilibeth B. Benedicto가 동료 경찰관인 Oriel Willy와 함께 마중 나와 있었다. 내가 필리핀의 치안에 대해 걱정하자 기꺼이 현지 에스코트와 가이드를 맡아준 것이다. 덕분에 필리핀의 모든 일정을 편안한 마음으로 소화하고 즐길 수 있었다.

박한선(좌)과 정찬승(우)

동행한 박한선 선생님과 함께

다음 날부터 시작된 이틀 동안의 회의는 열정적인 발표와 열띤 토론으로 가득 채워졌다. 도쿄대학교의 Takashi Izutsu의 부드럽고 세련된 사회로 시작하여, 세계보건기구 서태평양지부의 비감염성 질환 파트의 디렉터인 Susan Mercado와 호스트인 Yoshiharu Kim의 힘찬 인사말이 이어졌다. UN 대학교의 Atsuro Tsutsumi는 이번 전문가그룹회의의 목적을 잘 전달했다.

첫째 날 오전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참석자들이 자신의 국가에서 발생한 재난과 그 극복의 경험을 위주로 발표했다. UN 사무처의 Akiko Ito는 인도주의 활동에 대한 UN의 프레임워크에 대해서, Yoshiharu Kim은 동일본 대지진에 대해서, Andrew Mohanraj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쓰나미와 홍수에 대해서, Violeta V. Bautista는 필리핀의 하이얀 태풍에 대해서, Ananda Galappatti는 스리랑카의 재난에 대해서, 네덜란드의 Leslie Snider는 세계 각국의 재난에 대한 개입에 대해서, 미국의 Diane T. Castillo는 PTSD 프로그램에 대해서 자신의 경험과 의견을 나누었다. 나는 세월호 침몰 사고와 메르스 확산 시기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을 중심으로 한 정신건강 전문가들의 헌신적인 활동과 현재의 연구개발과제에 대해 발표했다. 이십여 명의 참석자들은 모든 발표에 실린 재난과 극복의 체험에 대해 진지하게 경청하고 토론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오전에 소진한 에너지를 채우기 위해 말로만 듣던 세계보건기구의 소박하면서도 훌륭한 식사를 맛보러 카페테리아로 내려갔다. 나와 박 선생은 스리랑카의 Ananda Galappatti와 함께 앉아 즐거운 담소를 나누었다. Galappatti는 The Good Practice Group과 Mental Health and Psychosocial Support (MHPSS)를 설립하여 분쟁과 재난, 가난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돕는 데 헌신하여 2008년에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라몬 막사이사이 상을 수상했다. 그는 자신과 단체의 활동에 대해 매우 흥미롭게 설명해주었고, 의료인류학자이기도 하여 인도와 스리랑카의 역사와 상징에 대해 풍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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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HPSS를 설립한 Ananda Galappatti와 함께

첫째 날 오후는 그룹토론으로 시작됐다. 정신건강과 정신장애를 인도주의 활동의 주된 초점으로 삼기 위한 주요 행동지침과 정보통신기술의 적용과 보급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했다. 마지막으로 전체 토론에서는 그룹토론에서 논의된 사항들을 요약하여 발표했는데, 세계보건기구의 정신건강담당인 Jason Ligot의 부드러운 진행과 날카로운 안목이 돋보였다. 박 선생은 이날 토론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여 많은 기여를 했다.

첫째 날의 모든 회의 일정을 마치고 나와 박 선생은 마닐라 베이를 따라 호텔까지 제법 긴 거리를 걸었다. 헤밍웨이가 마닐라 베이의 아름다운 풍광에서 영감을 얻어 ‘노인과 바다’를 쓰기 시작했다는 일화가 납득이 갈 정도로 멋진 석양이 펼쳐졌다. 우리는 오렌지빛 하늘과 몽환적인 바다를 앞에 두고 한국의 정신의학의 여러 화제를 나누며 밤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둘째 날은 이른 아침부터 회의실에 모여 각국의 재난 경험과 교훈들을 종합하고 심리적 응급처치를 포함한 재난심리지원 도구들을 리뷰했다. 전날 의견이 취합된 세계 인도주의 정상회의에 올릴 제안문을 최종 검토했는데, 이때 나는 ‘좋은 기술과 도구를 개발하자’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개발하고 보급하자’는 것으로 수정하여 각국에서 개발 중인 재난심리지원 도구와 방법론들을 적극적으로 공유할 것을  제안했고, 모든 참석자들의 공감과 동의를 얻어낸 것이 큰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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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에 참석한 각국의 재난정신건강전문가들

회의를 마친 후에는 세계보건기구의 재난위기관리 디렉터인 Li Ailan이 세계보건기구 내에서 가장 중요한 일들이 벌어지는 중앙통제실을 안내해주었다. 그녀는 한국에서 온 우리를 함박웃음을 지으며 열렬히 환영했는데, 그 이유는 메르스 확산 사태에서 자신이 한국의 정부부처와 이 중앙통제실에서 매일 화상회의를 하며 종식 선언까지 함께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중앙통제실 벽에 커다란 한국 지도와 감염자 등을 표시한 그래프가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을 보고, 우리나라의 재난을 위해 헌신한 그녀에게 깊은 감사의 말을 전했다. 세계보건기구의 비감염성 질환의 수장인 Susan Mercado는 나에게 따로 다가와서 ‘한국의 세월호 침몰 사고와 메르스 확산에 대응한 활동의 발표가 most powerful and impressive 했다.’며 한국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의 헌신을 극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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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보건기구 서태평양지부 재난위기관리 디렉터 Li Ailan과 함께

모든 공식일정이 마무리되었는데, 이번 회의를 주최한 Yoshiharu Kim은 특별히 한국에서 온 우리와 MHPSS의 Ananda Galappatti를 위해 일본팀과의 미팅을 마련해주었다. 그것은 심리적 응급처치의 보급과 인터넷을 통한 자가학습도구 개발에 관한 것이었고, 서로의 아이디어를 나누고 국제적인 협력의 발판을 마련한 중요한 시간이 되었다. 박한선 선생과 나는 당초 목표로 한 것보다 훨씬 큰 수확을 얻고 보람된 이틀간의 일정을 마무리하게 됐다.

다음 날은 필리핀의 친구들의 안내를 받아 필리핀 원주민 부족인 파물락라킨(Pamulaklakin)의 부락을 탐방했다. 작은 키와 가느다란 고수머리, 새소리처럼 가늘고 조용한 목소리가 인상적인 원주민들은 약초에 대한 지식부터 불을 피우는 지혜로운 방법들을 보여주었다. 특히 그 부족의 샤먼을 만나서 질병에 걸린 환자의 배에 뚫린 구멍을 통해 귀신을 빼낸다는 축귀 의식을 들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가이드를 맡아준 경찰관이 실탄이 장전된 총을 소지하고 다닐 정도로 마닐라의 치안이 불안하기는 하다. 하지만,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친절하고 소박했다. 특히 마닐라 베이의 아름다운 바다는 마음 깊이 남아있다.

자정이 되어 탑승한 비행기는 곧 난기류에 들어가서 한참을 요동쳤다. 박 선생은 태평하게 잠들어 있었지만, 나는 바짝 긴장했다. 재난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 비행기 안에 닥터콜이 울려 퍼졌다. 깊게 자던 박 선생은 반사적으로 선미로 뛰어나갔고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역시나 바닥에는 젊은 여자 승객이 공황발작으로 신음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승무원들이 메디컬 키트를 들고 있었다. 차분히 진찰을 하고 메디컬 키트에 들어있는 프로프라놀롤을 복용하도록 하고 종이봉투를 이용한 호흡법과 이완에 도움이 되는 복식호흡을 알려주고 정서적인 지지를 해주었다. 다행히 잠시 후 안정되어 무사히 착륙할 수 있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진료실 밖에서도 할 일이 많다. 먼 과거의 불확실한 트라우마에 매달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발생하고 있는 재난과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그 고통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재난은 한 개인을 넘어서 집단이 감당하기 어려운 트라우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세계적인 공조가 필요하다. 재난정신건강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유난히 서로를 돕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이번 회의를 주최하고 물심양면 한국을 도와준 Yoshiharu Kim에게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하고자 한다.

스크린샷 2016-03-16 오전 12.04.19

  •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뉴스레터인 ‘신경정신의학회보’ 제56권 2호 (2016년 2월 29일 발행)에 기고한 글을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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