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칼럼: 사기 피해자에게 필요한 건 비난 아닌 위로

정찬승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사회공헌 특임 이사한 청년의 믿기 힘든 사기 행각에 많은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재벌의 혼외자, 세계 최고의 학벌, 눈부신 청년 성공 신화, 양성을 오가는 연애담까지, 마치 사기꾼의 원형이라고 불러도 좋은 정도로 현란한 난장판이 펼쳐졌다. 하나씩 진실이 밝혀질 때마다 ‘어떻게 저런 얄팍한 수에 속았을까?’ 하는 의문이 이어진다. 사기꾼의 유혹은 사회를 지배하는 욕망의 그림자를 파고들어 건전한 이성을 마비시킨다. 더 많은 돈과 권력, 명예를 향한 탐욕도, 가난과 질병, 외로움의 고통에서 벗어나고픈 간절한 소망도 사기꾼들의 표적이 된다.

사기꾼의 심리적 특성은 탐욕과 부정직함이다. 오로지 경제적 이득만이 목적인 사기꾼도 있지만 남을 속이고 조종하는 쾌감을 즐기는 사기꾼도 있다. 어떤 동기가 됐든 사기꾼은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부도덕한 만행을 정당화한다. 기업이나 부유층을 상대로 사기를 친 사기꾼은 피해자들이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만하다고 떠벌리거나 의적 행세를 한다. 어떤 사기꾼은 ‘모두 적당히 남을 속이고 살지 않느냐’면서 일반화한다.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는 병적인 거짓말쟁이 사기꾼은 자신의 거짓말을 스스로 믿어버리기까지 한다.

사기 수법이 밝혀진 뒤 화려한 포장에 가려진 빈약한 본질이 드러나면 사람들은 사기꾼의 대담함에 혀를 내두르며 허탈감에 빠진다. 때로는 자극적인 드라마를 소비하듯 사기꾼의 행적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큰 관심이 필요한 사람은 고통과 절망에 빠진 피해자다.

사기는 피해자가 정서적으로 취약해지거나 스트레스가 많을 때, 피곤하고 주의가 산만해졌을 때 주로 발생한다. 사기꾼은 처음에는 피해자의 신뢰를 얻기 위해 애쓰고 피해자가 사기꾼에 대해 의심하지 못하도록 유도하거나 압박하고 주변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시킨 후 본격적인 사기 범죄를 시작한다. 사기를 당하지 않으려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좋은 제안’은 믿지 말아야 한다. 그 유혹에 넘어가는 순간 자기 욕망에 눈이 멀어 사기꾼의 술수가 보이지 않게 된다. 어떤 제안이나 압력에도 즉시 동의하지 말고 신뢰할 만한 제삼자 혹은 전문가의 의견을 구해야 한다.

누구라도 사기꾼에게 속아 넘어갈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 피해자를 비웃지 말아야 한다. 굵직한 사기 사건을 통해 보듯이 제아무리 똑똑하고 잘난 사람도 사기꾼의 표적이 되면 판단력이 마비된다. 사기를 당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사기를 당하지 않은 것은 다행히 표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법과 제도의 허점을 이용한 사기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전세 사기 피해자들의 안타까운 처지는 남의 일이 아니다.

사기를 당한 피해자는 물질적 피해뿐만 아니라 심리적 트라우마를 겪는다. 극심한 우울과 불안에 빠지고 분노를 주체하기 어려우며 불면에 시달린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사기꾼을 알아보지 못했고 잘못된 판단을 했다는 수치심과 자책감이 커져서 자살 충동이 들기도 한다. 술이나 약물에 의지하거나 가족이나 주변 사람과의 관계가 악화해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경우는 특히 위험하다. 마음의 고통이 심할 때는 즉시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는 것이 좋다. 인생 최악의 위기에 처한 피해자에게 필요한 것은 차가운 비난과 훈계가 아니라 따뜻한 지원과 위로다.

정찬승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사회공헌 특임 이사

동아일보. 2023년 11월 8일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0/0003529939?sid=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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