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형의 힘
– 국제분석심리학회 학술대회 참관기 –
정찬승 (융학파 분석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Chung Chan-Seung, M.D., Ph.D., Jungian Analyst
maumom@gmail.com
깊은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져 오히려 엄청난 감동을 선사하는 차이콥스키 교향곡 비창의 4악장 연주를 마치고 서둘러 짐을 챙겨 공항으로 향했다. 오케스트라 연주 일정이 겹치는 바람에 오랫동안 기다려온 국제분석심리학회의 개회식에 참석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차이콥스키의 진중한 감동이 예술의 도시로 향하는 발걸음에 힘을 실어주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는 2009년 알츠하이머 협회가 개최한 국제학회에 치매 연구자로서 수만 명에 달하는 뇌 영상 자료와 치매 연구 자료를 분석해서 발표하기 위해 방문한 적이 있다. 10년 만에 같은 도시를 전혀 다른 자격인 융학파 분석가가 되어 찾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1907년 32세의 젊은 카를 구스타프 융이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내방하여 중대한 첫 만남을 가졌던 바로 그 빈! 근대의 영광을 간직한 우아한 건축물과 여름의 끝자락에 어김없이 열리는 라트하우스 광장의 축제가 방문객을 환영해주었다. 밝은 금발 머리에 선명한 붉은색과 흰색이 인상적인 친절한 시민들도 여전했다.
학회가 열린 빈 국립대학교(Universität Wien)는 1365년에 설립되어 수많은 위대한 학자를 배출한, 중부 유럽에서 3번째로 오래된 대학이다. 찬란한 문화 예술을 꽃피운 아름다운 도시의 유서 깊은 대학으로 전 세계 1,200명 이상의 참가자가 몰려들었다. 국제분석심리학회 사상 최고의 대성황이었다. 나이 지긋한 분석가가 대부분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젊은 수련생들도 많이 참석해서 그야말로 분석심리학을 중심으로 한 집중력과 다양성이 충만한 학회였다.
매일 오전 Plenary Lectures가 열린 대강당은 앉을 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였다. 다양한 주제의 강연이 화려하게 펼쳐진 훌륭한 공부의 기회였다.
덴마크의 Ole Vedfelt는 ‘Integration versus conflict between schools of dream theory and dreamwork – Integrating the psychological core qualities of dreams with the contemporary knowledge of the dreaming brain’이라는 장황한 제목으로 뇌과학과 꿈의 해석을 연결하는 매우 명료한 강연을 해서 큰 호응을 얻었다. 뇌의 각 영역에 따른 꿈의 발현을 예시로 들고 알기 쉬운 사례를 들었는데, 복잡한 여러 가설들의 통합을 위한 노고가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예시로 든 꿈의 상징을 집단 무의식의 원형상으로서의 측면을 파고들기보다는 뇌의 생물학적 속성으로 환원시키려는 가벼운 접근 방식 때문에 나로서는 크게 동의하기 어려웠다.
점심시간에 이나미 선생님의 소개를 받아 뉴욕에서 온 Beth Darlington과 Royce Froehlich를 만나 식사를 하며 환담을 나누었다. 두 분의 이나미 선생님에 대한 진한 애정과 존중을 마음 가득 느낄 수 있었다. 이나미 선생님이 뉴욕 수학 시절 얼마나 열심히 연구하고 좋은 교분을 쌓았을지 미루어 짐작이 갔다. 뉴욕의 여러 분석가들이 이나미 선생님을 그리워하며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특유의 재치와 예리한 통찰로 웃음이 그칠 새 없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 와중에도 일부 분석가들이 정신분석 이론을 뇌 영상 등 뇌과학을 통해 입증하려는 시도의 모순성을 경계했다. 뇌의 구조와 기능 연구를 지고의 심판자처럼 떠받들어 고도의 정신분석 이론을 검증하는 행태가 얼마나 한심한 유물론적 어리석음인가 하는 것이다.
수요일 오전에는 융과 프로이트의 서간문을 중심으로 문헌을 재구성하여 두 거장의 대화를 창작하여 마치 연극을 하듯 두 명이 낭독하는 특이한 발표가 있었다. 빈이라는 도시가 그들의 만남의 무대이기에 더욱 흥미진진했다. 서로에 대한 매혹과 집착, 애증을 극적으로 펼쳐 보여서 청중이 폭소하는 일이 많았다. 융과 프로이트의 학문적 고민과 갈등보다는 투사와 전이에 초점을 두고, 가상의 대화를 창작한 허구성 때문에 나는 이것이 학술 발표라기보다는 여흥 거리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발표 후 갈채가 잦아들자 몇몇 분석가들이 점잖게 문제점을 지적했다.
목요일 저녁에는 Murray Stein과 Henry Abramovitch가 집필한 희곡 ‘The Analyst and the Rabbi’를 무대에서 연기한 필름을 감상했다. 첼로 선율을 곁들여 융과 랍비 Leo Baeck의 진지한 대화가 아니마의 매개로 이어지는 밀도 높은 작품이었다. 나치즘과 반유대주의 등 시대적 배경 속에서 그림자를 의식화하는 것을 주제로 했다. 상영 후 Murray Stein을 비롯해서 영상 제작에 참여한 스태프들의 좌담과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Murray Stein은 희곡 집필의 계기를 설명하며, 실제로 있었던 융과 랍비의 만남이 매우 중요했을 터인데, 그들이 나눈 대화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기에 강한 호기심을 느껴서 여러 방면의 조사를 거쳐서 창작했다고 밝혔다. 한 분석가가 일어서서 ‘이것은 실제 융과 랍비가 나눈 대화가 아니다. 당신 안에 있는 것이 표현된 것이다. 당신은 이 작품을 통해 당신 무의식의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나?’라고 질문했다. Murray Stein은 즉답을 피했다.
융은 특출나게 비범한 데다가 매력적이기까지 한 위대한 인물이다. 융을 소재로 소설가나 작가가 허구의 작업을 한 것은 이미 얼마든지 있고 납득이 간다. 그러나, 학술대회에서 학설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학자 개인을 소재로 삼아 뭔가를 만들고 발표하는 것이 그리 큰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융을 통해 세상에 나온 분석심리학이 다시 융의 개인사에 대한 관심으로 환원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물론 융의 일생과 주요 사건들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분석심리학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융이 공개를 금한 ‘붉은 책(Das Rote Buch)’을 출간한 것만으로도 이런 작업의 범위는 충분하고도 넘칠 지경이다. 도저히 알 길 없는 융의 개인적 만남과 대화에까지 자신의 상상력을 보탠 극작이 과연 분석심리학을 심화시킬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융이라면 이런 행태에 대해 뭐라고 할까?
몇몇 연자들은 융의 저작이나 원형에 대한 언급 없이 각종 타 학파의 이론과 뒤섞여 정체가 모호한 발표를 하기도 했다. 특히 트라우마에 대한 이론과 사례에서 그런 경우가 많았는데, 객관적 현실의 중요한 실제 인물상에 집중한 나머지 주관 단계의 심오한 내적 원형상에 대해서까지는 언급되지 않는 것이 아쉬웠다. 그러나, 이런 발표는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많은 발표는 주관 단계 해석과 집단 무의식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했다.
미국의 Donald E. Kalsched는 ‘Opening the closed heart: Affect focused clinical work with the victims of early trauma’ 제하로 자신의 트라우마와 분석을 통해 얻은 치유와 통찰을 공개하고 아동기 트라우마를 경험한 분석 사례를 정리해서 발표하여 큰 감동을 주었다. 또한 마지막 날 Peter Ammann, Fred Borchard, Renee Ramsden, Nomfundo Mlisa는 ‘Encountering the other: Jungian analysts and traditional healers in South Africa’라는 제목으로 남아프리카의 전통 치료사와 융학파 분석가가 정기적으로 만나서 교류하며 치유와 상징에 관해 토론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고하여 그 체험을 공유하는 값진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학회 참가자 전체가 참석한 Plenary Lectures에 대한 평가는 청중의 반응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청중은 집단 무의식의 원형상이 강력하게 표현되는 강연에 진심이 담긴 반응을 보였다. 세계 각지에서 온 분석가들이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고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훌륭한 강의를 한 연자는 질문에 답하는 태도에서도 과연 진심 어린 공감이 느껴졌다. 어떤 참가자는 원형상이 불러일으킨 정신적 흥분 때문에 격앙된 반응을 하기도 했다. 이것은 국내학회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현상이며, 원형이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방증이기도 하다.
오전의 열기 넘치는 Plenary Lectures가 끝나면, 오후에는 수십 개의 강의실에서 Break-out Sessions가 열렸다. 세계 각지에서 날아온 분석가들이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주제를 발표했고, 그것을 선택하여 듣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나는 특정 분야에 치우치지 않도록 다양한 주제를 듣기로 했다. 집단 무의식의 원형상에 대한 많은 인상적인 발표가 있었고, 특히 이번 학술대회 주제인 ‘Encountering the Other: Within us, between us and in the world’와 관련해서 국가, 인종, 젠더 등 모든 종류의 다양성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두드러졌다. 샌프란시스코 융 연구소는 ‘Reflections on the exclusion and inclusion of ethnically and economically diverse populations in the experience of the C. G. Jung Institute of San Francisco: Organizational change and “the other”’ 제하로 경제 수준, 인종, 젠더 등 모든 다양성을 존중하고 통합하려는 실제 노력을 보여주어 정책에 대한 식견을 넓혀주었다.
학회에 함께 참석한 한국의 분석가 중에 강연을 한 분은 이보섭 선생님(Der Kindarchetyp im Film “Little Buddha”), 이문성 선생님(Jungian understanding of “the pairs of Dharma” of Zen Buddhism), 이나미 선생님(Genetics and evolutionary psychiatry as “the others of Jungian psychology”)이 있다. 시간이 겹쳐서 모든 강연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간의 연구를 중심으로 훌륭히 전달하셨으리라 생각한다. 다행히 이나미 선생님의 강연에 참석할 수 있었는데, 새로운 주제와 개념이 빛나는 멋진 시간이었다. 강연 중에 많은 질문이 쏟아졌고 진지한 토론이 펼쳐졌다.
나는 화요일 오후 Break-out Sessions에 제1호 강의실에서 강연을 했다. 존경하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콘라트 로렌츠가 배우고 가르친 강단에 서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영광이었다. 동시간에 수십 개의 강의실에서 다양한 강연이 열리는데도 불구하고, 학회에 처음 등장한 젊은 분석가의 강연을 듣기 위해 많은 분석가들이 진지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것은 강연의 주제 때문일 것이다. 나는 비극적인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한국융연구원에서 1년여간 진행한 재난심리연구 모임의 성과를 요약해서 ‘재난의 심리적 의미(The Psychological Meaning of Disaster)’를 발표했다. 연구의 계기와 배경, 연구원들에 대해서 소개한 후 재난 생존자, 유가족, 치료자의 꿈을 분석하고 신화, 민담, 한국의 전통과 연결하여 확충하는 작업과 방대한 연구조사를 통해 도출한 재난이 인간 심성에 주는 의미에 대해 전달했다.
강연이 끝난 후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고, 이후에도 여러 분석가와 수련생이 찾아와 자신도 그 참사에 큰 충격을 받고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데, 이렇게 한국인들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그 의미를 발견해가는 과정을 전해줘서 정말 감사하다는 인사를 많이 받았다. 학회를 마무리하는 만찬장에서는 미국의 한 분석가로부터 내 강연이 이번 학회에서 가장 훌륭하고 감동적이었다는 찬사까지 받았다. 전하기에도 쑥스러운 이러한 호평은 생존자와 유가족을 오랫동안 만나고 도운 이주현 선생님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 또한 민담과 신화를 잘 정리한 김지연 선생님과 모든 연구를 지원하고 깊은 통찰로 지도해주신 이부영 선생님이 받아야 할 영광이다.
학회가 열린 빈 국립대학교와 만찬 행사가 열린 Palais Ferstel에서는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 많은 분석가들과 만나 인사를 드렸다. Joseph Cambray, Lynda Carter, Ann Belford Ulanov 등 여러 분석가들이 한국에서의 추억을 얘기하며 이부영 선생님께 감사와 안부 인사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만찬장에는 이문성 선생님 내외분과 이보섭 선생님이 참석했다. 이보섭 선생님의 정성이 담긴 배려로 많은 주요 인사들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분석가이자 Daimon 출판사 편집자인 Robert Hinshaw는 내년에 볼링겐 타워를 안내하겠다며 기꺼이 한국의 분석가들을 초대했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열린 태도로 환영해주는 사람들을 만나며, 이보섭 선생님이 그간 쌓아온 넓고 깊은 신뢰와 우정에 감탄했다.
학회의 백미는 진솔한 마음이 통하는 동료와의 만남이다. 옆좌석에 나란히 앉아서 내 강의를 들었다며 인사를 건네고, 생소한 북유럽과 동유럽의 분석가들을 안내해준 리투아니아 수련생의 순수한 친절이 기억난다. 로스앤젤레스의 Judith Hecker는 사려 깊은 맑은 눈으로 세월호 참사의 트라우마와 회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미국에 오거든 꼭 자기 집으로 오라고 당부하며 과분한 초대를 했다. 호텔에서 조식을 하던 중 우연히 대화를 시작한 미국의 Karen Smyers와의 만남도 즐거운 추억이다. 내 바로 다음 순서였던 그녀의 강연 제목은 ‘When Jungian theory itself is other to one’s soul: Gender-fluid models of individuation from ancient Egyptian myth’였다. 비록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그 제목과 얼굴을 기억하자 그녀는 금세 밝은 표정으로 자신의 암 투병 경험과 그 가운데 발견한 고통과 치유의 의미, 그리고 이집트 신화가 준 지혜를 들려주었다. 우리는 젠더 이슈와 분석심리학의 원형에 대해 공감대를 이루었다. 그 대화를 통해 나는 임상에서 젠더 이슈를 가진 피분석자와 분석을 진행하며 겪는 난관을 해결할 실마리를 얻었다. 그것은 어떤 합리적인 개념의 발견이라기보다는 진실한 만남이 주는 정서적 변화라고 생각한다. 학회를 마치고 들른 빈 미술사박물관에서 재회한 그녀는 자신의 주제인 이집트 예술을 감상하러 왔다며, 3년 후 꼭 다시 만나자면서도 암이 허락해주어야 하는 것 아니겠냐며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그녀와 다시 만나 새로운 체험과 이집트 신화 연구를 듣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여러 크고 작은 학회에 관여하고 참가해 왔지만, 이처럼 곳곳에서 학자들과 만나 공감하고 대화하며 자신의 삶과 원형적 체험을 공유하는 기회는 일찍이 가져본 적이 없다. 그 따뜻한 환대와 공감이야말로 깊은 인간 심성의 본질을 체득한 개인이 전달하는 최고의 선물일 것이다.
학회장과 만찬장에서의 새로운 기류 중 하나는 동유럽과 동아시아 분석가 그룹의 급성장이다. 대만에서는 동아시아문화정신의학회를 통해 익히 안면이 있는 Hao-Wei Wang이 수십 명의 동료와 함께 참가했는데, 최근에 분석가가 대거 배출되어 대만이 약 30명의 분석가가 활동하는 그룹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국제분석심리학회 신임 회장에 취임한 일본의 Toshio Kawai는 세계 각지에서 융학파 분석가 그룹이 발전하고 확장되어 큰 변화가 있다며 여러 계획을 제안했다. 나는 한국융연구원이나 한국융분석가협회의 대표자로서 참석한 것이 아니라 그저 배우기 위해 참석한 것이라서 여러 제안에 확답하지는 않았고, 한국에 가서 잘 전하겠노라고만 해두었다.
졸필로 참관기를 자세히 기록하는 것은 늘 감사드리는 이부영 원장님과 고마운 선배 및 동료 분석가들에게 경과를 보고하고, 한국융연구원에서 정통 분석심리학을 공부하는 후배 수련생들을 격려하기 위한 어떤 의무감 때문이다. 학술대회에 함께 참가하여 부족한 후배를 아끼고 챙겨주신 선배 분석가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따뜻해진다. 바쁜 일정 가운데 학회장 안팎에서 교류를 터주고 응원해주신 이나미 선생님과는 함께 있기만 해도 저절로 어깨가 펴졌다. 이문성 선생님 내외분이 베풀어준 후의도 잊을 수 없다. 한국인 참가자들을 모아 열어주신 만찬으로 웃음과 생기를 찾아 남은 일정을 헤쳐나갈 수 있었다. 라트하우스 광장 축제에서 술잔을 기울이다가 갑자기 쏟아진 폭우에 흠뻑 젖으면서도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이보섭 선생님의 인도를 받아 역사적인 카페에 앉아서 나눈 속 깊은 대화, 동행하여 돌아본 유서 깊은 멜크 수도원, 10년 만에 방문해서 새로운 감동을 맛본 알베르티나 미술관은 평생 가져갈 소중한 추억이다. 나는 전심으로 후배를 위해 애써주신 이보섭 선생님의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고자 소박하고 정겨운 호이리게로 안내하여 녹음이 우거진 정원에서 와인의 흥취와 함께 빈의 마지막 밤을 만끽했다.
만찬에 동석한 스위스의 Kristina Schellinski가 내 첫 참가를 축하하며 진지하게 물었다. 이 학회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것이 무엇이냐고.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원형의 힘’이라고 답했다. 그녀는 뜻밖의 대답에 놀라면서도 이어지는 내 말에 곧 수긍했다. 사상 최대 규모의 국제분석심리학회 학술대회에 참석하여 느낀 첫인상은 분석심리학의 확장이다. 분석심리학은 그 개념도 확장되고 양적으로도 팽창하고 있다. 그에 따른 오염의 위험성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서 더러 불편하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간소하고 얄팍해진 분석가 수련 과정을 쫓아다니고 유명 인사와의 무의미한 친분을 과시하는 등 외적 페르조나의 팽창이 급속도로 이루어지는 만큼 분석심리학은 오염의 위기를 겪고 있다. 그런 경계심은 실재하는 것이기도 하고 내 그림자의 투사이기도 하다. 그 후 여러 강연과 만남을 통해 확신한 것은 확장이든 오염이든 그것을 압도하는 집단 무의식의 원형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분석심리학자들의 가슴에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이다. 분석심리학의 중심에서는 전체정신의 중심인 자기원형이 그 탐구자들을 끊임없이 온전함으로 이끌어줄 것이며, 급속한 확장에 가려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무의식의 심층을 깊이 진지하게 고찰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성실한 분석가들이 그 진의를 생생한 체험으로 드러낼 것이다.
각국의 대표단은 클림트의 벽화로 화려하게 장식된 연회장에서 열린 회의를 통해 2022년 국제분석심리학회 개최지로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선정했다. 지구상 한국의 대극에 위치한 아르헨티나에서 열리는 차기 학술대회에는 많은 한국 분석가와 수련생들이 참가하여 세계 각지에서 다양하게 적용되며 연구되고 있는 분석심리학을 접하고, 그 기저에 약동하는 원형의 힘을 느끼기를 바란다. 또한 외면적 확장을 넘어서는 내면적 심화를 통해 한국융연구원이 얼마나 철저하고 훌륭하게 분석심리학의 정수를 교육하고 있는지 실감하기를 바라며 참관기를 마친다.
XXI International Congress for Analytical Psychology
Encountering the Other: Within us, between us and in the world
August 25-30, 2019, Vienna, Austria
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Analytical Psychology
정찬승 (융학파 분석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Chung Chan-Seung, M.D., Ph.D., Jungian Analy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