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19일 한국에서 출발한 트라우마-재난정신건강 전문가들과 함께 도쿄역에서 후쿠시마행 신칸센에 몸을 맡겼다. 목적지는 동일본대지진의 가장 큰 피해지역인 후쿠시마현과 미야기현의 재난정신건강센터. 자연재난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우리나라와는 달리 일본은 늘 지진의 위협을 받고 있다. 1995년 한신대지진으로 인해 효고현, 고베시를 중심으로 6천여 명이 사망하고 약 2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2011년 발생한 동일본대지진 때는 사망자와 실종자가 2만여 명에 이르고 이재민이 33만여 명에 달했다. 일본은 재난 피해가 심각한 지역의 시민들이 심리적 고통으로부터 회복하는 것을 돕기 위해 트라우마 대응 체계를 발달시켜 왔다. 재난정신건강센터인 ‘마음의 케어 센터’를 세워서 피해자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일을 지속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2014년 세월호 침몰 사고 후 가장 큰 피해를 당한 안산시에 ‘안산온마음센터’를 설립하여 피해자와 시민들의 트라우마 회복에 힘쓰고 있다. 이번 일본 방문의 목적은 보건복지부 중앙정신건강사업지원단 재난정신건강정보센터 연구원들과 안산온마음센터 학술용역연구사업 연구원들이 참여하여 한일 간의 트라우마 치유 환경과 경험, 지혜를 공유하기 위함이었다.
열차가 후쿠시마 역에 도착하자 일행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시내 주요 지역에 세워진 방사능 측정기의 전광판에는 방사능 수치가 붉은색으로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후쿠시마 현립 의과대학 병원에 설치된 후쿠시마 마음의 케어 센터에서 만난 센터장 마에다 교수는 지진과 쓰나미에 이어 원자력발전소의 사고가 터진 후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의 불신이라고 했다. 시민들은 정부에서 발표하는 피해 상황과 대책을 믿지 못하고, 도움을 주러 온 센터의 직원들에게 의혹의 눈길을 던지며 멀리했다. 원전사고가 나자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피신 갔다가 다시 마을로 돌아온 이웃을 따돌리는 일도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난정신건강센터에서는 수십 명의 직원이 쉴 틈 없이 일하고 있었다. 각 지역 피해자들의 상태를 파악하고 현장지원을 나가고 자료를 정리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이렇게 5년을 달려온 것이다. 예로부터 아름다운 자연과 신선한 농수산물, 온천이 유명한 후쿠시마에는 재난이 휩쓸고 간 후 상처와 불신, 피로감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일반적으로 재난을 당한 직후에는 피해자와 현장 지원자, 시민들 모두 공동체의 재건을 위해 힘과 용기를 다해 발 벗고 나서게 된다. 이 시기를 영웅기라고 부른다. 고난 앞에서 결코 굴하지 않는 영웅처럼 긍정적인 태도를 갖고 재난을 이겨내려는 것이다. 그 후 수개월 동안은 공동체가 협력하여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신혼기가 온다. 한신대지진 현장의 정신건강지원을 지휘한 일본의 원로 정신과 의사 신푸쿠 나오타카 교수는 지진으로 고베시가 초토화되어 도시 행정, 방범체계가 무너졌을 때도 일본인이 저지른 범죄는 한 건도 없다고 소개한 적이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인내와 노력이 한계에 다다르고 여러 가지 행정 서비스에 대한 불만이나 보상 문제 등 현실적 갈등이 불거지면서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오는 환멸기에 빠지게 된다. 이 시기를 잘 극복해야만 재난 지역의 일상이 회복되어 현실적인 재건을 도모하는 재건기가 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후쿠시마는 불신과 갈등에 지친 나머지 지원자들마저 정서적으로 소진된 모습이었다.
다음 목적지는 미야기현의 중심도시 센다이였다. 진앙에서 가장 가까웠던 센다이는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미야기 마음의 케어 센터에서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워크숍을 통해 한국과 일본의 전문가들은 서로 많은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젊은 리더인 정신과 의사 후쿠치 나루 센터장은 세심하고 배려가 깊은 사람이었다. 5년 동안의 심리지원을 통해서 얻은 경험과 데이터를 정리하여 트라우마의 심리를 분석한 결과를 보여주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재난을 겪은 어린이를 교육하기 위해 스케치북에 직접 그려 만든 트라우마 회복 교재였다. 일본에는 두루마리 그림[에마키, 繪卷]이라 하여 그림으로 이야기를 전하는 전통 회화 양식이 있는데, 그것에서 착상하여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재난이 일어났을 때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달라지고 우리가 그 마음을 어떻게 하면 잘 달래고 회복할 수 있는지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알려주는 교재를 일종의 글씨 없는 큰 그림책으로 직접 만든 것이다.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고 스케치북에 일일이 그리는 수고를 한 이유는 재난 현장에서는 전력과 컴퓨터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소아과 의사로서 수련을 마친 후 다시 정신의학, 그중에서도 소아청소년 정신의학을 전공한 후쿠치 선생의 자상함과 세심함에 크게 감탄했다. 그의 이런 따뜻한 태도는 시민들과 마음의 케어 센터 직원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쳐서 미야기현은 가장 큰 피해지역임에도 갈등과 소진을 극복하고 재건이 잘 이루어지게 됐다. 우리는 이 인연을 소중히 이어나가기로 하고 2017년 6월 서울에서 개최한 ‘재난정신건강서비스 발전을 위한 국제 세미나’에 그를 연자로 초청했다. 후쿠치 선생은 2016년 세계보건기구 서태평양지부 전문가회의를 통해 연결되어 초청한 스리랑카의 아난다 갈라파티(Mental Health & Psychosocial Support Network: MHPSS의 설립자)와 함께 큰 환대를 받았다.
후쿠시마와 미야기의 일정을 마친 한국의 연구원들은 도쿄로 돌아와 4월에 발생한 구마모토 지진의 재난정신건강지원 실무를 맡고 있는 규슈 의과대학의 쿠가 교수와 세계보건기구의 카야노 선생을 만나 전반적이고도 실용적인 재난정신건강 지원 체계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짧고도 강렬한 일본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는 좋은 기회였다.
사실상 한국에서 ‘재난정신건강’이라는 분야가 전문가들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2014년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라고 볼 수 있다. 세월호 침몰 사고의 생존자들은 기존의 다른 재난과 달리 신체적 외상이 거의 없었으며 심리적 외상, 즉 트라우마가 가장 큰 문제가 됐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내에 재난정신건강위원회가 설치되고 전문가들이 결집했으며, 이는 이듬해 메르스 유행 등 각종 재난 상황에 신속하게 대처하는 기반이 됐다. 안산시의 안산온마음센터는 트라우마 치유에 집중하는 첫 번째 공공 치유기관으로서 자리를 잡았다. 이제 2018년 상반기에는 국립정신건강센터 내에 국가재난트라우마센터를 설치하여 국가 차원의 트라우마 관리 체계를 마련하고 심리지원을 펼칠 예정이다. 짧은 기간 내에 이만큼의 체계를 잡아갈 수 있었던 데에는 과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트라우마 분야의 연구와 임상경험을 축적해 온 여러 전문가의 공이 크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재난과 트라우마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은 것은 건물 붕괴, 교량 붕괴, 선박 침몰, 대형 화재 등 주로 사회재난의 비중이 컸으며, 마음속 트라우마를 치유하기보다는 관련자 처벌과 보상 문제 등에만 정부와 언론의 관심이 치우친 탓이 있다. 이제는 시민들의 의식이 성숙함에 따라서 보이지 않는 마음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국가 또한 국민의 트라우마 치유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됐다. 특히 2017년 11월에 발생한 포항 지진으로 많은 시민이 극심한 스트레스 반응을 겪었고, 이것은 재난정신건강과 트라우마 치유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여러 해 동안 성실하게 구축해 온 재난정신건강 정보센터의 재난정신건강 가이드라인이 피해지역 주민들을 상담하고 시민들의 마음을 돌보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개인과 그 사회가 감당하기 힘든 피해를 입히는 큰 사건을 재난이라고 한다. 재난에 대해서는 생명과 건물, 재산, 환경을 지키는 외적 대응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압도적인 위력에 의해 무너지는 것은 우리의 신체와 외적 자원들만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 무너져 무력감에 빠져들면 외적 대응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된다. 재난 상황에서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마음의 건강을 지키는 내적 대응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국가적인 큰 재난과 사회적인 여러 캠페인을 통해 갈수록 트라우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제 트라우마의 중요성을 인지한 우리 사회가 긍정적인 태도로 힘을 모으는 영웅기, 혹은 신혼기를 보내며 순항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뜨거운 관심이 환멸에 빠지지 않고 안정된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개인 각자의 마음의 성숙이 중요하다. 집단의 유행은 망각되지만 개인의 성숙은 결코 의미 없이 사라지지 않는다. 개인에 있어서도, 사회에 있어서도 이미 발생한 트라우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할 일은 트라우마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변화시켜 그 고통을 딛고 일어나 새로운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뉴스레터(2018년 3월호), 계간 미술치료(2018년 봄호)에 기고한 글의 일부를 수정했습니다.
글 _ 정찬승 (융 학파 분석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의학박사)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신보건위원회 상임위원
대한신경정신의학회·대한정신건강재단 재난정신건강위원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이사
보건복지부 중앙정신보건사업지원단 재난정신건강정보센터 연구원
울산대학교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교수
마음드림의원 원장
http://www.maumdre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