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의료 현장을 위하여” 칼럼. 동아일보

2018년 세밑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세원 교수가 외래진료 도중 불의의 참사를 당했다.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임 교수는 다른 의료인들의 안전을 위해 헌신했다. 의료 현장은 생명을 살리는 곳이지 위협받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 그간 진료실, 응급실, 병실 등 의료기관 도처에서 의료인에 대한 폭력이 자행돼 왔다. 이는 비단 한국의 문제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의 의료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다.

종종 의료인은 질병과 씨름하는 극한 상황의 한복판에서 기대와 감사, 실망과 원망의 대상이 됐다. 폭언, 폭행, 협박 등 폭력을 당한 의료인은 신체적 고통은 물론이고 심리적 고통, 특히 불안과 두려움, 트라우마 반응까지 겪을 수 있다. 폭력은 의료인 개인의 신체와 정신의 건강을 파괴하고 인권과 존엄성을 위협한다. 치료 환경과 환자 치료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안전이 위협받는 불안한 상황에서 최선의 진료는 불가능하다.

구미 선진국은 의료인에 대한 폭력을 예방하기 위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처벌 규정을 강화하고 교육 프로그램을 보급해 왔다. 미국은 대부분의 주에서 의료인 대상 폭력에 가중처벌을 적용한다. 영국은 의료인 대상 폭력을 국민 건강을 위협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철저한 무관용 대응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영국 보건당국은 1999년 무관용 대응을 천명한 후에 오히려 의료인 폭력 피해 신고 건수가 늘어나자 정책이 성공했다며 환영했다. 이전에는 폭력을 당해도 신고조차 하지 않고 체념하고 묻어두었던 의료인들이 적극적으로 신고하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의료인의 안전이 보장받을 수 있게 됐다.

의료 현장의 폭력을 처벌만으로 막을 수는 없다. 우선 폭력을 행하는 환자와 보호자의 심정을 살펴봐야 한다. 의료 서비스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의료 서비스 전반을 개선해야 한다. 의사와 환자 간 의사소통과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고통에 빠진 절박한 순간에 불통과 몰이해는 환자와 보호자의 분노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의료인은 환자와 보호자에게 공감하는 진심 어린 태도를 익혀야 한다. 온갖 이유를 붙여서 의료인을 위협하는 장면을 자극적인 영상으로 만들어 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마비시키고 의료인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부추기는 대중매체의 행태도 개선해야 한다.

임세원 교수가 생전에 자살예방사업 등 국민 정신건강 증진을 위해 헌신한 사실이 알려지며 그의 희생은 온 국민의 마음에 깊고 무거운 울림을 전달했다. 임 교수의 유족은 “평소 고인은 마음의 고통이 있는 모든 분이 사회적 편견이나 차별 없이 누구나 쉽게, 정신적 치료와 사회적 지원을 받기를 원했다”고 전했다. 유족의 성숙한 대처는 폭력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경종을 울렸다. 폭력을 당한 의사만이 아니라 폭력을 행한 환자의 마음까지 헤아리고 보살피는 큰 의사의 모범을 보여준 것이다.

임세원 교수와 유가족의 숭고한 유지를 받들어 보건당국은 정신질환자 치료 체계를 개선해야 한다. 정신질환자는 위험한 사람이라는 잘못된 편견을 바로잡아 누구라도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치료받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자. 피해망상, 환각 등 심한 급성기 증상을 가진 중증 정신질환자가 제때 치료받지 못하면 극히 일부에서 자신과 타인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 망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해서 자신이 병들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며 치료를 거부하는 중증 정신질환자의 경우에 현행 제도로는 치료를 받게 하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 현실을 외면한 형식적 규제 탓에 가족과 의료인, 일상의 시민조차 위험에 처한다. 무엇보다 큰 고통을 겪는 것은 질병을 가진 환자 자신이다. 중증 정신질환자 치료의 책임을 더 이상 가족과 의료인에게만 떠넘겨서는 안 된다. 정부가 직접 나서서 환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건강하게 살 권리를 보장해줘야 한다.

의료인의 희생은 폭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 환자 치료를 위한 것이다. 폭력 없는 안전한 의료 현장에서 의료인은 환자의 건강을 지킬 수 있다. 환자와 의료인, 모든 시민의 안전, 즉 의료 현장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 그 목적은 고통에 빠진 사람을 치료하기 위함이다. 최선의 의료 서비스를 위해서 두려움에 기인한 차갑고 소극적인 안전이 아니라 치유를 위한 따뜻하고 적극적인 안전이 필요하다.

정찬승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故 임세원 교수 추모사업위원회 위원)

기사 원문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90926/97608150/1

정찬승 (국제공인 융학파 분석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의학박사)

국제분석심리학회 정회원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신보건위원회 상임위원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이사

대한신경정신의학회·대한정신건강재단 재난정신건강위원

울산대학교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교수

마음드림의원 원장

임세원 교수님을 추모합니다

고 임세원 회원의 의사자 지정 불승인에 대한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입장

❍ 보건복지부 의사상자심의위원회가 고 임세원 교수의 의사자 지정을 승인하지 않았다는 너무나도 안타까운 보도와 관련하여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전합니다.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동료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한 고인의 숭고한 뜻이 의사자 지정을 통해 기억되고 함께 지속적으로 추모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 자신을 희생하고 동료를 살린 임세원 교수는 반드시 의사자로 지정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의사들에게 어떻게 살라고 이야기해야 합니까?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는 상황이 생기면 동료를 무시하고 본인의 생명만을 우선 챙기라고 해야 할까요? 승객을 버려두고 혼자서만 탈출하는 침몰선의 선장처럼 자신만 탈출하라고 해야 할까요? 희생을 인정받기 위해, 의사로서 칼을 든 피의자와 목숨을 건 몸싸움을 해야만 희생과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 2018년 12월 31일 한해의 마지막 날 가방에 칼을 숨긴 피의자가 예고 없이 병원을 찾아왔습니다. 유가족이 제공한 법원 기록에 따르면 피의자는 병원, 기업, 국가가 자신의 뇌에 소형폭탄 칩을 심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고 이와 관련된 여러 사람을 해치겠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 2019년 1월 2일 서울 종로경찰서는 “임 교수가 진료실 문 앞 간호사에게 ‘도망치라!’고 말하고 본인은 반대편으로 도피했다”며 “가다가 간호사가 피했는지 확인하려는 듯한 모습으로 서서 간호사를 바라봤고, 피의자가 다가오자 다시 도피를 시작했다. 간호사를 대피시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볼 수 있는 모습이 CCTV에 포착됐다”라고 설명했다고 여러 언론을 통해 보도된 바 있습니다. 임세원 교수의 죽음을 무릅쓴 숭고한 희생에 감동한 수많은 국민, 동료 의료인, 언론인, 국회의원 등이 여러 언론 매체와 인터넷 매체에서 고인의 의사자 지정을 촉구했습니다.

❍ 고 임세원 교수는 자신을 찾아온 환자분들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겪고 있는 분들이며 ‘이것이 나의 일이다’라고 다짐하며 환자분들과 힘겨운 치유의 여정을 함께 한다는 글을 남긴 바 있습니다. 임 교수는 자신의 진료를 ‘전력투구’에 비유할 정도로 막중한 책임감을 가졌습니다. 임 교수의 책임감은 그의 마지막 진료까지 이어졌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에 예약 없이 불쑥 찾아온 환자를 돌려보내지 않고 의사로서 책임을 다했습니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가 유가족을 통해 받은 법원 자료 등에 따르면, 오후 5시 39분에 피의자가 진료를 받기 시작했고 불과 3분 만에 임세원 교수가 간호사에게 신호를 보냅니다. 1분 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임 교수가 옆방으로 이동했고 이때 외래 간호사가 진료실 문을 열자 임 교수가 ‘도망가’라고 소리치며 외래 간호사의 반대 방향으로 뛰어나갑니다. 바로 뒤따라 나온 피의자는 좌측의 외래 간호사에게 칼을 휘둘렀고 불과 50센티 정도의 차이로 칼을 피하게 됩니다. 이때 임 교수는 간호사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며 발길을 멈추었고 간호사 스테이션을 향해 “빨리 피해! 112에 신고해!”라고 소리칩니다. 이 외침에 피의자는 임 교수 쪽으로 방향을 돌려 추격하기 시작하고 이후 참혹한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불과 10초 후 보안요원이 도착하였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습니다.

❍ 의사자란 직무 외의 행위로써 구조행위를 하다가 사망한 사람으로 정의합니다. 구조행위는 자신의 생명 또는 신체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급박한 위해에 처한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행위를 말합니다.

❍ 피의자에게 흉기로 위협받는 밀폐된 방은 이미 진료 현장이라 부를 수 없는 범죄 현장입니다. 임세원 교수는 흉기로 생명을 위협당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생명보다 간호사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임세원 교수는 1) 방을 나오면서 간호사가 있는 쪽으로 피하지 않고 반대편으로 피했고 2) 본인의 안전을 우선 생각하여 계속 뛰지 않고, 멈추어 뒤를 돌아보아 위험에 처한 간호사의 안전을 확인했고 3) 멈추어 다른 간호사에게 ‘빨리 피해! 112에 신고해!’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소리는 피의자가 간호사를 해치는 행동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고 다시 임 교수를 쫓게 한 신호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지키려는 달음질을 멈추어 뒤를 돌아보고 동료에게 대피하고 구조를 요청하라고 소리친 행동이 매우 짧은 시간 동안 신속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의사상자심의위원회는 고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위협받는 순간 타인의 안전을 지키려 한 이 찰나의 행동이 생사를 갈랐습니다. 보안요원의 출동 시간을 고려할 때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 피했다면, 적어도 본인은 안전했을 것이지만, 다른 사람이 희생당했을 수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 위기상황에 있었던 동료 간호사는 의사자 신청을 위한 진술서에서 “만약 저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 피하셨더라면 이런 끔찍한 상황을 모면하셨을 텐데, 본인이 위급한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주변 동료를 살피시다 사고를 당하셨으므로 의사자로서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당시 사건 현장에서 도움을 받았던 다른 동료 직원들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 고 임세원 교수의 ‘생명을 지키는 의료인’으로서의 책임감과 그에 따른 의로운 행동은 많은 동료 의료인, 예비 의료인 그리고 국민들의 마음에 슬픔을 넘어 희망과 신뢰의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또한 임 교수를 잃고 누구보다 큰 고통을 겪고 있던 유가족들은 경찰을 통해 임 교수의 숭고한 희생을 알게 된 후, 참혹하고 비통한 상황에서도 환자에 대한 고인의 사랑을 이어받아 ‘안전한 진료환경’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편견과 차별 없이 쉽게 치료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달라는 메시지로 고인의 유지로 밝히고 조의금으로 들어온 1억 원을 기부하는 등 우리 사회에 깊은 울림을 주셨습니다. 임세원 교수의 의사자 지정을 위해 부인께서 전한 메시지를 다시 한번 전합니다.

“저희 가족이 남편을, 아빠를 황망히 잃게 되었으나, 그래도 남편이 그 무서운 상황에서도 간호사나 다른 사람들을 살리려 한 의로운 죽음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지지 않고 의사자로 지정이 되면 저희 가족, 특히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가는 데 힘이 될 듯합니다.”

❍  고 임세원 교수의 발인 날 고인의 어머님께서는 “우리 세원이, 바르게 살아줘서 고마워!”라고 마지막 인사를 전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CCTV에 녹화된 희생 영상을 봐야 했던 저희의 마음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웠습니다. 한편 누구보다 이 영상을 보기 힘들었을 유족들이 어떤 마음인지 감히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의사자 인정 여부가 사회적 논란이 될까 유족도 염려하신 줄 압니다.  마지막 찰나의 순간까지 바르게 살기 위해 애쓴 고인을 우리가 의사자로 기억하고 오래오래 추모할 수 있기를, 그 희생이 각박한 우리 사회에 등불이 될 수 있기를, 그리고 이를 통해 유가족분들의 고통과 아픔을 사회가 위로할 소중한 기회가 마련되기를 기원하며 대한신경정신의학회도 최선을 다해 지원하겠습니다.

  • 이 글은 임세원 교수를 추모하고, 보건당국이 그 숭고한 희생의 의미를 인정하기를 촉구하기 위해 대한신경정신의학회가 발표한 입장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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