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 에세이 ‘治癒(치유)의 나무’

내 진료실 한쪽에는 커다란 나무가 자라고 있다. 크고 튼튼한 둥치에 쭉쭉 뻗은 굵은 가지들, 무성한 잎사귀들을 보면 저절로 힘이 솟는다. 나에게 정신분석을 받은 한 여성이 선물한 생명력이 넘치는 나무다.

그녀가 처음 나를 찾아온 것은 어느 해 가을이었다. 그녀는 초점을 잃은 눈동자로 병원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도무지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했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과 영혼은 상처투성이였다. 싱그러운 젊음으로 빛을 발해야 할 얼굴은 술과 절망에 시들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 대해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왜 그런 극단적인 행동을 했는지, 어떤 충동적인 감정에 휩싸인 것인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어느 것도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저 진료실 테이블에 반쯤 기대어 헝클어진 머리를 두 손에 묻고 공허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녀의 자아(自我)는 허공을 부유하며 헤매고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게 해주는 것, 그녀의 잃어버린 영혼을 되찾아주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꿈을 통해 무의식으로 들어가자고 제안했다. 다행히 그녀는 그 작업에 기꺼이 동참했다.

매번 가지고 오는 그녀의 꿈은 충격과 폭력의 연속이었다. 골방에 갇힌 어린 소녀가 겨우 탈출하면 문밖에서 지키고 있던 사나운 남성들이 그 소녀를 찢어버렸다. 그녀의 순수하고 여린 영혼은 잔혹한 남성들의 폭력에 의해 갈기갈기 찢긴 것이었다. 그녀의 감정은 출구를 통과할 수 없었고, 감정을 잃어버린 그녀의 자아는 점점 메말라가고 있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그녀는 자신의 의식 저편에 묻어두었던 기억들을 토해냈다. 어린 시절 그녀는 끔찍한 성폭력을 당했고,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누구도 그녀의 고통을 알지 못했고, 누구도 그녀의 흐트러져가는 모습을 돌봐주지 않았다. 그녀조차도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 드리지 않는 딸이 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은 오히려 그녀 자신을 더욱 큰 걱정거리로 만들어버렸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회피하기 위해 술과 무절제한 생활에 빠져들었다. 잠시라도 혼자가 되는 시간에는 파괴적인 충동이 끓어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치명적인 심리적 외상의 피해자였다. 거대한 자연재해나 집단적 참사만이 심리적 외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성폭력은 가장 끔찍한 심리적 외상 중 하나다.

그녀의 기억 저편에서 트라우마가 튀어나오기 시작하자 정신분석은 본격적으로 거친 파도를 타기 시작했다. 그녀는 극단적 충동과 어린아이 같은 퇴행 사이를 오갔다. 의식의 표면으로 올라온 트라우마는 그녀를 순순히 놓아두지 않았다. 나는 고통받는 그녀의 곁에서 묵묵히 동행해줄 수밖에 없었다.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카를 구스타프 융은 ‘치료자란 함께 동행(同行)하는 자’라고 했다. 치료자가 할 일은 조용하고 신중한 자세로 고통의 길을 걷는 사람의 곁을 지켜주는 것이다.

어느 날 그녀는 부모님께 자신의 트라우마를 얘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용기 있게 자신의 아픈 상처를 드러냈고,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곁을 지켜주었다. 깊은 상처를 받은 자에게 얄팍한 위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마음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동정의 말을 들으면 자신의 처절한 심정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상대방을 원망하며 더욱 마음을 닫게 된다. 그녀의 어머니는 값싼 동정이 아니라 진심 어린 공감으로 딸의 말을 경청하며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어머니는 그 고통을 온전히 느꼈고 딸의 심정이 되어 그 곁에 있어준 것이다.

정신분석이 계속 진행되며 그녀의 자아는 점점 힘을 얻게 됐다. 그때 놀라운 꿈이 찾아왔다. 자신만의 멋진 나무를 그리는 꿈이었다. 매우 커다란 나무에 많은 가지가 뻗어 있었고, 그 가지 가운데에 풍성한 잎사귀로 둘러싸인 원형의 거울이 매달려 있었다. 그 거울에는 아름다운 무지개가 물결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꿈을 깨고 나서 그녀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충만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녀는 무의식에 있는 치유(治癒)의 나무를 찾은 것이다.

그 꿈을 꾸고 난 후 차츰 그녀는 놀랍게 달라져 갔다. 고통을 지녔지만 전보다 덜 고통스러워하는 성숙한 여인이 되어 갔다. 길고 긴 그 과정을 통과하며 그녀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어느덧 그녀와의 정신분석은 종결의 시점을 맞게 됐다. 그녀는 혼자 살아갈 힘을 얻었고, 나는 그녀의 미래를 축복해주었다.

몇 달이 지난 후 그녀는 작은 그림 한 장을 보내주었다. 나는 그 그림을 진료실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림 속에는 튼튼하고 아름다운 치유의 나무가 자라고 있다. 나는 초록빛 잎사귀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무지개 거울을 보며 그녀의 무의식에 있는 무한한 치유력을 떠올리곤 한다.

우리는 사람의 고통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전체를 보아야 한다. 고통을 당한 사람과 동행하며, 그 사람의 내면에 있는 건강한 마음이 살아나도록 용기를 북돋워주어야 한다. 비록 지금 너무나 힘들지라도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자신만의 치유의 나무가 자라고 있다.

글 _ 정찬승 (융학파 분석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의학박사)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신보건위원회 상임위원
대한신경정신의학회·대한정신건강재단 재난정신건강위원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이사
보건복지부 중앙정신보건사업지원단 재난정신건강정보센터 연구원
울산대학교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교수
마음드림의원 원장

  • 이 글은 세월호 침몰 사고 후 온 국민이 슬픔에 잠겨 있던 시기에 회복의 메세지를 전하기 위해 조선일보의 오피니언 섹션에 기고한 에세이를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정신분석을 통해 트라우마를 극복한 한 여성의 이야기를 정신분석 종결 후 정리한 것입니다.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자신의 소중한 경험을 나누는 것에 동의해주신 그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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