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승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1. 정신병리와 시간의 속도
우울증이 있는 사람은 정신활동의 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에 시간이 평소보다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 지연 현상을 경험합니다. 하루가 더 길게 느껴질 수 있으며, 간단한 일을 하는 데에도 지나치게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불안한 사람은 시간이 평소보다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 가속 현상을 경험합니다. 각성 상태가 높아지면 정신적, 생리적 활동이 증가하여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긴장감과 걱정 때문에 시간이 부족하거나 과제를 완수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시간이 빨리 흘러간다는 느낌과 압박감이 커질 수 있습니다.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은 기억이 파편화되거나 왜곡되어 사건의 순서와 시간 감각이 흐트러지고 뒤섞이는 시간 해리 현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트라우마로 인한 과도한 각성과 경계 상태 때문에 시간이 급박하게 흐른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트라우마 사건이 현재 경험에 계속 큰 영향을 미치면서 과거의 시간 속에 ‘갇혀 있다’고 느끼는 시간 고착 현상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트라우마가 심리적 상황을 지배하고 앞으로 나아가거나 발전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2. 나이와 시간의 속도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더 빨리 흐른다는 인식은 많은 사람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의 속도에 대한 감각을 과거의 감각과 비교합니다. 젊었을 때는 1년 또는 한 달이 인생에서 비교적 길고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같은 시간이라도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따라서 전체 삶의 경험과 비교할 때 각 단위 시간은 상대적으로 짧게 느껴집니다.
시간의 속도에 대한 인식은 처리하는 새로운 정보의 양에 영향을 받습니다. 어릴 때는 새롭고 참신한 경험이 많기 때문에 뇌는 이를 처리하고 기억하는 데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 정신활동을 투입합니다. 젊었을 때는 새로운 경험을 많이 접하고,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낯선 환경을 탐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뇌는 새로운 정보를 더 광범위하게 처리하기 때문에 새로움은 시간의 속도에 대한 감각을 확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예측 가능한 일상에 익숙해지고, 새로운 경험을 접하는 횟수가 줄어들고, 처음 접하는 환경이 줄어들면서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반복적인 일상 경험을 처리하는 데 큰 에너지가 필요하지 않고 정신활동의 부하가 줄어듭니다. 이러한 효율성은 시간이 더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우리는 정해진 일과와 익숙한 행동 패턴에 안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복적인 활동과 예측 가능한 일정을 따를 때, 우리 뇌는 이러한 경험을 점점 더 빨리 처리하게 되면서 기억해야 할 새롭거나 독특한 사건이 줄어들기 때문에 시간이 더 빨리 지나간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새로움이 줄어들고 익숙함이 늘어날수록 시간은 지루하고 천천히 흘러갑니다. 주목할 만한 의미 있는 사건이 있다면 단 하루의 시간도 풍부하게 느껴지지만, 무의미한 일상이 반복되는 경우 일 년도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고 느껴집니다
3. 시간의 속도와 시간의 의미
너무 바빠도 시간이 순식간에 지났다고 느낍니다. 어릴 때는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즐거운 일이 많지만, 나이가 들수록 타인이 요구하는 책임감, 약속, 의무가 많아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렇게 외적인 요구에 의한 활동에 집중하고 몰두하다 보면 그 시간을 음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맡겨진 역할을 해치우기 바쁘니 어느새 시간이 빨리 지나가고 만다고 느낍니다.
더욱 시간이 빨리 흐를 때는 내향적 활동에 몰두할 때입니다. 외향적 활동을 할 때의 시간은 외적인 기준에 맞추어 일정하게 흐른다고 느껴지지만, 내향적 활동, 즉 사색, 명상, 공상 등에 몰두할 때 시간의 속도는 매우 빠르게 느껴집니다. 젊을 때는 외향적 활동을 통해서 세상에 적응하지만, 노인이 되면 자연스럽게 내면세계로 관심이 이동하면서 내향적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지나가 버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시간의 속도에 대한 감각은 경험하고 있는 현재의 시간과 회상 속 과거의 시간이 다릅니다. 즐겁고 새로운 경험을 하는 동안, 그 현재의 시간은 아주 신나고 빠르게 흘러갑니다. 나중에 그 시절을 되돌아보면 그 시간은 기억할 일들이 아주 많은 풍부한 체험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다고 느낍니다. 이것은 시간이 지루하게 흘러갔다는 것이 아니라 매우 많은 사건과 정보를 담아서 천천히 기억할 수 있도록 시간을 보냈다는 의미입니다. 타성에 젖은 반복적인 일상을 사는 경우, 그 현재의 시간은 매우 지루하고 천천히 흘러가며, 나중에 그 시간을 되돌아보아도 별로 기억할 것이 없으니, 회상 속에서는 빨리 흘러간 것으로 느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별다른 의미 없이 지루하면서도 훌쩍 지나가 버린 시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시간의 속도가 빠른가 느린가보다는 그 시간을 의미 있고 풍부하게 보냈는가 무의미하고 빈약하게 흘려보냈는가가 중요합니다. 일상이 지루한데도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간다면, 의미 있는 창조적인 활동을 시작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자신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 줄 활동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면 그 시간은 속도와 무관하게 의미 있고 풍성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시간의 속도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시간의 의미입니다.
정찬승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사회공헌특임이사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홍보위원장
마음드림의원 원장
* 동아일보 자문으로 시간을 느끼는 감각에 대해 인터뷰 하기 위해 정리한 글입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0/0003508937?sid=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