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대한신경정신의학회 공동 기획] ‘한국인은 불안하다’ ⑩ 마음속 울화가 엉키고 맺혀 생기는 화병, 속 깊은 대화로 치유해야 – 정찬승 마음드림의원 원장

마음속 울화가 엉키고 맺혀 생기는 화병, 속 깊은 대화로 치유해야

[한국일보-대한신경정신의학회 공동 기획] ‘한국인은 불안하다’ ⑩정찬승 마음드림의원 원장

경직된 표정의 중년 여성이 가슴이 터질 것처럼 답답하고 묵직한 덩어리가 치밀어 오른다면서 진료를 받으러 왔다. 몸의 불편함을 호소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슬픔과 설움이 가득했다. 전형적인 신체증상을 동반한 우울증 또는 화병의 증상이었다. 게다가 사람이 많은 곳을 매우 두려워하는 광장공포증과 마치 죽을 것 같은 불안이 반복되는 공황발작까지 겪고 있었다.

남편과 사별한 그녀는 이미 성인이 된 자녀들이 독립하자 홀로 외로이 지내다가 우연히 한참 젊은 남성을 만나서 재혼했다. 그 남성에게는 중학생 딸이 있었다. 가까운 곳에 사는 시어머니는 낯선 살림에 적응하는 그녀를 물심양면 도와주었다. 이렇게 별문제가 없어 보이는 피상적인 상황만 말하던 그녀는 최근에 반복해서 꾸는 꿈을 들려주었다.

“꿈속에서 나는 남편과 침대에 누웠어요. 그런데, 어느새 남편의 전처도 함께 누워 있다는 걸 알았죠.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깨어났어요.”

사정을 자세히 묻자 그녀는 마음을 열고 쌓여 있는 울분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집안에 전처의 흔적이 너무 많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남편이 전처와 함께 잤던 침대도 그대로일 뿐 아니라, 중학생 딸은 늘 친엄마와 비교하며 새엄마를 밀어냈다. 어쩌다 딸이 친구를 집에 데려오기라도 하면 그녀는 숨죽인 채 방 안에 숨어 있어야 했다. 시어머니의 세심한 도움의 뒤편에는 새 며느리에 대한 불신과 친손녀에 대한 강렬한 집착이 깔려 있었다.

그녀는 일본인이었다. 일본에 출장 온 한국인 남성을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을 결심하고 바다를 건너 한국에 왔지만 그녀의 자리를 찾기에는 힘에 부쳤다. 한국의 유별난 시어머니도, 예민하기 그지없는 중학생 딸도 모두 그녀를 힘들게 했다. 나는 그녀에게 당장 침대부터 바꾸라고 했다. 그런 불쾌함과 설움을 참고 지내면 마음속에 울화가 쌓여 병을 만들기 때문이다.

꿈에 나타난 침대 위의 전처는 현실적으로 내쫓아야 할 적이지만, 무의식의 의도를 깊이 이해하자면 결국 그녀와 합해져야 할, 그녀가 애써 외면해오던 한국의 여성상을 의미한다. 그녀는 일 년이 넘도록 한국어를 한마디도 배우지 않고 지내왔다. 짓눌린 분노의 수동적 표현이었던 셈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이제 이 땅, 이 집안의 사람으로 자리를 잡으라”고 조언했다. 그녀는 다문화센터에 다니며 한국말을 배우고 일본인 친구도 사귀어 외로움을 달랠 수 있게 됐다. 용기를 낸 그녀가 새엄마를 무시하고 대화를 회피하던 딸을 앉혀 놓고 솔직한 심정을 얘기하자, 딸도 자신의 불만을 터뜨렸다.

힘들더라도 진실한 감정이 통하자 마침내 딸은 그녀를 ‘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시어머니의 불편한 도움도 정리했다. 처음에는 소란스러운 충돌이 있었지만, 곧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녀는 마음속 깊이 억압된 화를 풀어냄으로써 울분을 해소하고 새로운 가정을 더욱 단단히 할 수 있게 됐다.

현대의 수많은 정신건강 전문가들이 화를 다스리는 방법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다. 화를 참는 방법, 화를 없애는 방법, 애초에 화가 나지 않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마치 화가 아무 쓸모 없는, 문제만 일으키는, 감당하기 어려운 애물단지 감정인 것처럼 취급하는 것 같다. 그러나, 화는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원초적인 감정이다.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감정이라고 해서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화가 나는 것을 잘 처리하지 못해서 오랫동안 몸이 아파 누워 있거나 기운을 쓸 수 없는 상태를 화병이라고 한다. 정신의학적 용어로 바꿔 말하면, ‘심한 신체증상을 동반한 우울증’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에 따라 다양한 감정 표현이 있다. 그러나, 그 중심의 심성은 인류 공통의 것이다. 인종과 국가를 막론하고 부당하게 억압된 화는 마음의 병을 만든다. 화병은 마음속에 울화가 엉키고 맺혀서 생기는 병이다. 엉키고 맺힌 것은 풀어내야 한다.

애먼 사람에게 화풀이를 할 것이 아니라 정성껏 화를 풀어내야 하는 것이다. 스스로 하기 어렵다면 옆에서 도와주면 된다. 공감과 이해, 속 깊은 대화는 마음의 병이 된 화를 풀어내는 가장 좋은 치유법이다. 건강하게 표현된 화는 인생을 가로막은 문제를 해결하는 강력한 추진력이 된다.

  • 대한신경정신의학회와 한국일보가 공동으로 기획한 ‘한국인은 불안하다’ 시리즈 중 2018년 8월 7일 한국일보에 실린 에세이를 일부 수정했습니다.

글 _ 정찬승 (융 학파 분석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의학박사)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신보건위원회 상임위원
대한신경정신의학회·대한정신건강재단 재난정신건강위원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이사
보건복지부 중앙정신보건사업지원단 재난정신건강정보센터 연구원
울산대학교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교수
마음드림의원 원장
http://www.maum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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