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보건기구 서태평양지부 전문가그룹회의 참석을 마치고

2016년 1월 13일 수요일, 방배동의 아담한 진료실에서 오전 진료를 마친 나는 펄펄 내리는 눈을 헤치며 조심스레 운전을 하여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서 만난 박한선 선생은 멋진 카우보이 모자와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영락없는 인류학자였다. 우리는 공항 라운지에 마주 앉아서 이번에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 위치한 세계보건기구 서태평양지부 사무처에서 열리는 전문가그룹회의가 얼마나 중요한 일이며, 거기에서 우리가 어떤 성과를 거두어야 하는지에 대해 한참 의논했다. 이번 회의는 일본의 국립정신신경연구센터의 Yoshiharu Kim이 주도하여 세계 각국의 재난과 트라우마에 관한 정신건강 전문가들을 마닐라로 초청한 것이다. Yoshiharu Kim은 재일교포 3세로 일본의 심리적 트라우마 치유의 국가적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한국의 재난정신건강 분야의 발전을 위해 많은 배려와 지원을 아낌없이 제공해 왔다. 이번 회의는 재난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회복하기 위한 기법과 정보통신기술을 개발하고, 2016년 5월에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개최되는 세계 인도주의 정상회의에 상정할 제안문을 준비하는 것이 목적이다. 나와 박한선 선생은 정신건강기술개발사업단의 ‘재난정신건강지원 정보 콘텐츠 및 플랫폼 개발’ 연구과제를 담당하고 있다. 우리는 이번 회의를 통해서 세계적 동향을 파악하고 우수한 인적 네트워크를 확보하여 교류와 협력을 이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늦은 밤에 도착한 마닐라 국제공항에는 필리핀 중앙경찰청에서 근무하는 친구 Lilibeth B. Benedicto가 동료 경찰관인 Oriel Willy와 함께 마중 나와 있었다. 내가 필리핀의 치안에 대해 걱정하자 기꺼이 현지 에스코트와 가이드를 맡아준 것이다. 덕분에 필리핀의 모든 일정을 편안한 마음으로 소화하고 즐길 수 있었다.

박한선(좌)과 정찬승(우)

동행한 박한선 선생님과 함께

다음 날부터 시작된 이틀 동안의 회의는 열정적인 발표와 열띤 토론으로 가득 채워졌다. 도쿄대학교의 Takashi Izutsu의 부드럽고 세련된 사회로 시작하여, 세계보건기구 서태평양지부의 비감염성 질환 파트의 디렉터인 Susan Mercado와 호스트인 Yoshiharu Kim의 힘찬 인사말이 이어졌다. UN 대학교의 Atsuro Tsutsumi는 이번 전문가그룹회의의 목적을 잘 전달했다.

첫째 날 오전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참석자들이 자신의 국가에서 발생한 재난과 그 극복의 경험을 위주로 발표했다. UN 사무처의 Akiko Ito는 인도주의 활동에 대한 UN의 프레임워크에 대해서, Yoshiharu Kim은 동일본 대지진에 대해서, Andrew Mohanraj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쓰나미와 홍수에 대해서, Violeta V. Bautista는 필리핀의 하이얀 태풍에 대해서, Ananda Galappatti는 스리랑카의 재난에 대해서, 네덜란드의 Leslie Snider는 세계 각국의 재난에 대한 개입에 대해서, 미국의 Diane T. Castillo는 PTSD 프로그램에 대해서 자신의 경험과 의견을 나누었다. 나는 세월호 침몰 사고와 메르스 확산 시기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을 중심으로 한 정신건강 전문가들의 헌신적인 활동과 현재의 연구개발과제에 대해 발표했다. 이십여 명의 참석자들은 모든 발표에 실린 재난과 극복의 체험에 대해 진지하게 경청하고 토론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오전에 소진한 에너지를 채우기 위해 말로만 듣던 세계보건기구의 소박하면서도 훌륭한 식사를 맛보러 카페테리아로 내려갔다. 나와 박 선생은 스리랑카의 Ananda Galappatti와 함께 앉아 즐거운 담소를 나누었다. Galappatti는 The Good Practice Group과 Mental Health and Psychosocial Support (MHPSS)를 설립하여 분쟁과 재난, 가난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돕는 데 헌신하여 2008년에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라몬 막사이사이 상을 수상했다. 그는 자신과 단체의 활동에 대해 매우 흥미롭게 설명해주었고, 의료인류학자이기도 하여 인도와 스리랑카의 역사와 상징에 대해 풍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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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HPSS를 설립한 Ananda Galappatti와 함께

첫째 날 오후는 그룹토론으로 시작됐다. 정신건강과 정신장애를 인도주의 활동의 주된 초점으로 삼기 위한 주요 행동지침과 정보통신기술의 적용과 보급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했다. 마지막으로 전체 토론에서는 그룹토론에서 논의된 사항들을 요약하여 발표했는데, 세계보건기구의 정신건강담당인 Jason Ligot의 부드러운 진행과 날카로운 안목이 돋보였다. 박 선생은 이날 토론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여 많은 기여를 했다.

첫째 날의 모든 회의 일정을 마치고 나와 박 선생은 마닐라 베이를 따라 호텔까지 제법 긴 거리를 걸었다. 헤밍웨이가 마닐라 베이의 아름다운 풍광에서 영감을 얻어 ‘노인과 바다’를 쓰기 시작했다는 일화가 납득이 갈 정도로 멋진 석양이 펼쳐졌다. 우리는 오렌지빛 하늘과 몽환적인 바다를 앞에 두고 한국의 정신의학의 여러 화제를 나누며 밤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둘째 날은 이른 아침부터 회의실에 모여 각국의 재난 경험과 교훈들을 종합하고 심리적 응급처치를 포함한 재난심리지원 도구들을 리뷰했다. 전날 의견이 취합된 세계 인도주의 정상회의에 올릴 제안문을 최종 검토했는데, 이때 나는 ‘좋은 기술과 도구를 개발하자’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개발하고 보급하자’는 것으로 수정하여 각국에서 개발 중인 재난심리지원 도구와 방법론들을 적극적으로 공유할 것을  제안했고, 모든 참석자들의 공감과 동의를 얻어낸 것이 큰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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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에 참석한 각국의 재난정신건강전문가들

회의를 마친 후에는 세계보건기구의 재난위기관리 디렉터인 Li Ailan이 세계보건기구 내에서 가장 중요한 일들이 벌어지는 중앙통제실을 안내해주었다. 그녀는 한국에서 온 우리를 함박웃음을 지으며 열렬히 환영했는데, 그 이유는 메르스 확산 사태에서 자신이 한국의 정부부처와 이 중앙통제실에서 매일 화상회의를 하며 종식 선언까지 함께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중앙통제실 벽에 커다란 한국 지도와 감염자 등을 표시한 그래프가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을 보고, 우리나라의 재난을 위해 헌신한 그녀에게 깊은 감사의 말을 전했다. 세계보건기구의 비감염성 질환의 수장인 Susan Mercado는 나에게 따로 다가와서 ‘한국의 세월호 침몰 사고와 메르스 확산에 대응한 활동의 발표가 most powerful and impressive 했다.’며 한국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의 헌신을 극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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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보건기구 서태평양지부 재난위기관리 디렉터 Li Ailan과 함께

모든 공식일정이 마무리되었는데, 이번 회의를 주최한 Yoshiharu Kim은 특별히 한국에서 온 우리와 MHPSS의 Ananda Galappatti를 위해 일본팀과의 미팅을 마련해주었다. 그것은 심리적 응급처치의 보급과 인터넷을 통한 자가학습도구 개발에 관한 것이었고, 서로의 아이디어를 나누고 국제적인 협력의 발판을 마련한 중요한 시간이 되었다. 박한선 선생과 나는 당초 목표로 한 것보다 훨씬 큰 수확을 얻고 보람된 이틀간의 일정을 마무리하게 됐다.

다음 날은 필리핀의 친구들의 안내를 받아 필리핀 원주민 부족인 파물락라킨(Pamulaklakin)의 부락을 탐방했다. 작은 키와 가느다란 고수머리, 새소리처럼 가늘고 조용한 목소리가 인상적인 원주민들은 약초에 대한 지식부터 불을 피우는 지혜로운 방법들을 보여주었다. 특히 그 부족의 샤먼을 만나서 질병에 걸린 환자의 배에 뚫린 구멍을 통해 귀신을 빼낸다는 축귀 의식을 들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가이드를 맡아준 경찰관이 실탄이 장전된 총을 소지하고 다닐 정도로 마닐라의 치안이 불안하기는 하다. 하지만,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친절하고 소박했다. 특히 마닐라 베이의 아름다운 바다는 마음 깊이 남아있다.

자정이 되어 탑승한 비행기는 곧 난기류에 들어가서 한참을 요동쳤다. 박 선생은 태평하게 잠들어 있었지만, 나는 바짝 긴장했다. 재난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 비행기 안에 닥터콜이 울려 퍼졌다. 깊게 자던 박 선생은 반사적으로 선미로 뛰어나갔고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역시나 바닥에는 젊은 여자 승객이 공황발작으로 신음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승무원들이 메디컬 키트를 들고 있었다. 차분히 진찰을 하고 메디컬 키트에 들어있는 프로프라놀롤을 복용하도록 하고 종이봉투를 이용한 호흡법과 이완에 도움이 되는 복식호흡을 알려주고 정서적인 지지를 해주었다. 다행히 잠시 후 안정되어 무사히 착륙할 수 있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진료실 밖에서도 할 일이 많다. 먼 과거의 불확실한 트라우마에 매달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발생하고 있는 재난과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그 고통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재난은 한 개인을 넘어서 집단이 감당하기 어려운 트라우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세계적인 공조가 필요하다. 재난정신건강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유난히 서로를 돕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이번 회의를 주최하고 물심양면 한국을 도와준 Yoshiharu Kim에게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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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뉴스레터인 ‘신경정신의학회보’ 제56권 2호 (2016년 2월 29일 발행)에 기고한 글을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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